김한종 교수님의 「한국현대사의 성격과 사회의 변화」에 대한 정리

 1  김한종 교수님의 「한국현대사의 성격과 사회의 변화」에 대한 정리-1
 2  김한종 교수님의 「한국현대사의 성격과 사회의 변화」에 대한 정리-2
※ 미리보기 이미지는 최대 20페이지까지만 지원합니다.
  • 분야
  • 등록일
  • 페이지/형식
  • 구매가격
  • 적립금
자료 다운로드  네이버 로그인
소개글
김한종 교수님의 「한국현대사의 성격과 사회의 변화」에 대한 정리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김한종 교수님의 「한국현대사의 성격과 사회의 변화」에 대한 정리
한국 사회는 일제 식민지 시대를 거쳐 해방 이후 분단과 전쟁이라는 커다란 정치적, 사회 경제적 변화를 겪었다. 그 속에서 현대국가 건설을 위해선 해방과 정치적 기반, 사회경제적 조건이 충족되어야만 하였다. 해방은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배에서 해방되는 것과 봉건사회로부터 해방을 의미할 수 있는데 일본제국주의로부터의 해방은 해방과 동시에 이루어졌고, 봉건사회로부터 해방은 근대 자본주의 사회와 근대 자본주의 모순에서 나타난 사회주의화라는 두 가지로 나타났다. 근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서구 자본주의 국가들은 자본과 노동력을 바탕으로 산업혁명이 가능하였지만 식민지나 반식민지가 된 국가들에서는 농민과 토지가 생산수단으로 서구와는 다른 현대사회 건설하게 되었다. 해방이후 미군정 속에서 서구방식에 의한 현대사회 건설의 모색은 자연스러운 일이었고 행정의 각 분야에서 영향력을 강화하며 정치적 기반을 다져갔다. 하지만 사회주의적 방식으로 국가를 건설해야한다는 사람들은 냉전체제가 강화되는 정세 속에서 점차 약해졌다. 또한 두 세력 사이에서 민족을 내세워 통합을 모색하던 민족주의 진영의 힘은 더욱 미약했다. 좌우합작이라는 이름으로 몇 번의 노력이 있었지만 결국 분단이라는 대립의 결과를 가져왔다. 분단은 한국전쟁이라는 한민족간의 전쟁을 야기했으며 사회구조적, 정치, 군사적 뿐만 아니라 언어와 같은 일상생활 까지 제한하였다.
1948년 미군정이 끝나고 들어서 대한민국 정부, 즉 이승만 정부의 국가 건설방향은 미군정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이승만 정부는 유상매수, 유상분배라는 농지개혁을 하였지만 농민들은 소농화되어 사회경제적 지위를 향상시키지 못하고, 지주는 산업자본가로 전환되지 못하였으며, 친일파 숙청은 정치적 실용성과 반공을 구실로 하는 이승만의 정치적 기반보호를 위해 흐지부지 되었다. 또한 미국의 원조경제, 교육제도 등 미국의 영향을 크게 받았고 미국식 민주주의를 지향하였다. 하지만 결국 이승만 정부가 3·15 부정선거로 4·19 혁명이후 물러나고 5·16 쿠데타로 박정희 정부가 들어서게 되었다.
박정희는 반공과 근대화를 명분으로 쿠데타를 일으키고 대중에게 강력한 카리스마를 보여줌으로써 권력을 유지하고자하였다. 반공은 해방이후 모든 통치자들의 무기로 정권을 유지시키고 외적인 힘을 보이기 위한 제도적 장치였고, 대중들에게 있어서 먹고사는 문제는 그 무엇보다 중요하였기 때문에 근대화는 대중의 내적 지지를 이끌어 내는 역할을 하였다. 박정희의 근대화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 베트남 파병, 한일국교 정상화 등 경제면에 초점이 맞춰있었고, 근대화 과정 속에서 상대방의 정치활동을 하지 못하게 하는 등의 정치를 독점하고 장기집권을 시작 하였다. 하지만 장기집권에 대한 국민들의 반응은 매우 거세게 반발하였다.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 초 경제적 어려움도 작용하였지만 더 이상 근대화라는 구호만으로는 모든 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며 정치적으로 1971년 선거에서 김대중에게 고전하는 등의 정치·경제적 상황에서 박정희는 결국 10월 유신이라는 극단적인 강압정책을 하였다. 헌법에 규정된 국민의 기본권마저 중지시키거나 제한할 수 있는 긴급조치권을 통해서 대통령은 헌법 위에 존재하는 초헌법적인 존재가 되고, 국민을 하나로 묶기 위해서 한국적 전통, 한국적 민주주의 등을 내세웠지만 결국 유신체제는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피살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 이후 불어닥친 민주화의 열기는 12·12 쿠데타라는 신군부 전두환의 집권으로 불타오르지 못하였다. 전두환의 통치방식은 박정희정부와 크게 다르지 않았고 언론통제, 삼청교육대, 광주 민주항쟁과 같이 힘으로 사회장악을 하고 야간통행금지해제, 교복·두발 자율화 같은 유화정책을 함께 하였다. 하지만 1970년대 까지 주로 정치와 경제 문제에 집중되던 민주화 움직임은 점차 문화, 학술, 예술 등 사회전반으로 확산되면서 전두환 정부는 힘으로 억누르려고 하였지만 6월 항쟁이라는 국민 전체의 거센 반발을 통해 사회민주화의 요구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후 야당의 분열로 집권하게 된 노태우 정부는 여소야대의 정국 속에서 점차 권력핵심층의 성격이 바뀌기 시작하였고, 권력의 기득권을 제한하기 위한 조치들이 취해지고 지방자치제가 전면적으로 실시되는 등의 통치 방식에서도 근본적인 변화가 나타났다. 여소야대의 정국을 해결하기 위해 여당이던 민정당과 야당인 공화당, 민주당의 3당 합당에서 나온 김영삼 정부의 개혁은 본질적으로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자유주의와 세계화라는 세계정세 속에서 신자유주의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우루과이라운드로 농업시장이 개방되고 자본시장의 개방이 급속히 추진되었지만 결국 김영삼 정부는 보수성을 그대로 유지한 기존의 권력층에서 주류만 바뀐 것이었다.
신자유주의의 세계 속에서 더 이상 이념만으로는 권력을 얻기 어려웠으며 IT산업이 활성화되는 국제사회의 변화 속에서 제대로 적응하지 못해 IMF위기를 맞게 되면서 정부수립 후 처음으로 보수에서 진보로 정권교체가 이루어졌다. 김대중 정부는 국민의 정부라는 참여민주주의 와 공정한 시장경제를 내세웠으며 지난날동안 일어났던 전두환·노태우 정부시절의 정치적 사건들이 재평가 되고, 남북대립과 이념분쟁 속에 묻혀있던 문제들이 겉으로 드러나면서 남북정상회담과 같은 일들이 진행되었다. 또한 정치적 변화는 다른 대통령들과는 다른 노무현 정부가 들어서면서 더욱 가속화 되었다. 기존과 다른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출현은 기득권층이나 이를 지지하던 사람들이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지키고 권력을 되찾아오기 위해 자유주의니 뉴라이트니 하는 이름으로 조직적으로 행동에 나서게 하였다. 이 사람들은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많은 정책을 비판하고 잃어버린 10년 이라고 표현하지만 현재사회의 흐름인 세계화, 신자유주의라는 커다란 흐름을 받아들인다는 것에서는 차이가 없다. 해방이후 부터 지금까지 끝없이 발생하는 이념논쟁의 원인은 바로 권력다툼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끝없는 이념 논쟁은 해방이후 오랫동안 계속된 분단과 이념의 대립 속에서 한국사회가 겪어야 하는 불가피한 과정으로 생각되지만 현명하게 이념의 대립을 극복하여 좀 더 나은 한국사회가 되도록 노력해야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