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의 역사 강경애 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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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문학의 역사 강경애 전기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한국문학의 역사
- 강경애 전기 -
내가 여류 작가 강경애를 만난 것은 1934년 간도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녀의 남편 장하일과 친해지면서 그녀 또한 만났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당시 나는 간도의 동흥중학교 교사로 재직하고 있었다. 장하일과 강경애 부부가 조선 황해도 장연에서 이주해온 뒤, 장하일이 친구의 소개로 그 학교에 교사로 부임해 왔던 것이다. 나중에 듣기로는, 본래 장하일에게는 조혼한 본처가 있었지만 지금의 부인인 강경애를 장연에서 만난 뒤 본처를 버렸다고 한다. 그로 인해 이런 저런 문제가 생겨 결국 장연을 떠나야 했다고 하던가.
장하일과 친분이 쌓인 뒤, 종종 신세진 보답이라던가 하며 저녁 식사에 초대받아 그의 집에 방문하였다. 그렇게 나는 강경애를 만났다. 나 역시 지식인으로써 신문도 당연히 읽고 문단에도 관심이 있어 문예지도 종종 보고 있었기에, 강경애가 쓴 글을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그녀의 글은 어조가 강하고 사회 참여에 대해 적극적인 태도가 느껴졌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래서 어떠한 사람일까 내심 기대가 강했다. 그러나 직접 만났을 때의 강경애의 분위기는 내가 막연히 상상했던 것과는 달랐다. 교육받은 여성이긴 했으나, 모던 걸처럼 꾸미지 않은 소박한 머리와 한복 차림. 조선 여성 특유의 통통한 얼굴에는 적극적이고 자신만만하다기 보다 오히려 침착하고 다소 우울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솔직히 말이 저녁 초대이지, 피차 넉넉한 형편이 아니었다. 간도에 이주해서 자리 잡은 지도 1년 남짓 정도 밖에 되지 않았고, 게다가 항일 투쟁 운동에 개입하고 있는 몸이었다. 오히려 식사는 핑계고 시국이나 활동에 대하여 개인적으로 이야기했던 자리라고 표현하는 것이 알맞을 듯싶다. 경애는 가사를 맡으며 작가로서 활동하였는데, 남편에게 있어 그녀는 좋은 아내이면서 뜻을 같이 하는 동지였다. 상을 차릴 때의 그녀는 소박하고 성실한 주부였으나, 같이 이야기를 할 때에는 자신의 의견을 확고하게 말했다. 교육받았음에도 여성이 사회 활동하는 것에 대해 주제넘게 참견한다고 보는 보수적인 지식인도 분명 그 당시 존재했지만, 적어도 우리 사이에는 그런 선입관은 없었다.
다만, 대화하면서 강경애는 딱히 주변에 소음이 없는데도 잘 안 들렸다며 방금 했던 이야기를 다시 말해달라고 요청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처음에는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지만 비슷한 일이 반복되다 보니 혹시 그녀가 난청증이 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궁금증은 돌았으나 개인적인 문제가 아닌가 하여 망설이다가, 결국 나중에 장하일에게 물어보니 사실이라고 하였다. 우리 사이니 스스럼없이 이야기 하는 것이라며 운을 떼기를, 그와 만나기 전 학생 시절에 강경애는 양주동이라는 사람과 연애를 한 적이 있다고 하였다. 그녀는 당시 평양 숭의여학교에 재학 중이었는데, 반봉건과 계몽사상을 주장하던 양주동의 강연을 듣고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그 후 양주동의 누나의 집에 찾아가 집안일을 돕고 문학담도 나눈 끝에 두 사람은 애인 사이로 발전했다. 그러나 1923년 10월, 강경애는 동맹 휴학 사건에 관련되어 퇴학당하였다. 하지만 학업을 포기하지 않고 양주동과 서울로 상경해 동거하며 동덕여학교 3학년에 편입하여 1년간 공부했다. 그 기간이 1년인 이유는, 양주동과 강경애가 헤어졌기 때문이다. 둘의 관계가 끝난 뒤 양주동은 그녀를 고향인 장연에 데려다 주고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고 한다. 장연으로 돌아온 강경애는 언니가 경영하는 서선 여관에 몸을 의탁하였는데, 양주동과의 연애와 서울로 상경했다가 학업을 중도에 그만두고 온 것에 대해 분노한 형부가 그녀에게 손찌검을 한 것이 잘못되어 그 때 귓병을 얻게 되었다.
1931년에 현재 남편인 장하일을 만날 때까지 장연에서 지내던 기간 강경애가 무엇을 하였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남편에게도 제대로 말하지 않았다고 한다. 장하일이 장연에 공무원으로 부임해 와서 만났을 당시, 그녀는 문학 공부를 하며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신여성들이 그렇듯, 강경애 양주동과의 연애 사건으로 역시 주변의 시선이 곱지 않았다. 그녀에게 드리워진 그림자는 그 때 얻은 것이 아닐까. 애인과 헤어지고, 귓병을 앓게 되고, 주변에선 따가운 눈총이 쏟아지는 등 그녀에게는 정신적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던 참에 군청의 고원으로 부임해 온 장하일이 서선 여관에 머물면서 강경애와 가까워졌고, 결혼에 이른 것이다. 문제는 앞서 말했듯, 장하일의 전처가 나타나서 장연에 있을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지만.
1930년대 문단은 일제의 검열이 심해지고 카프에 대한 검거 선풍이 불면서 사회 비판 참여적 작품이 이전에 비해 줄어들었다. 그 와중 강경애의 작품 및 글은 사회성이 매우 강했다. 특히 그녀는 간도에 사는 조선인들의 삶을 자신의 소설에 담았다. 당시 일본이 간도 역시 넘보고 있어서 상당히 어수선했지만, 조선 본토에 비하면 제재는 약한 편이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그래도 문단에 발표하려면 어느 정도의 검열을 넘겨야 했겠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