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드하면 생각나는 것들과 그에 대한 내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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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스피드하면 생각나는 것들과 그에 대한 내 의견
‘스피드’하면 생각나는 것은 내 군 생활 밖에 없다. 하긴 그도 그럴 것이 전역한지 아직 반년도 안 됐다.결론부터 말하면 군대에서의 내 모습은 느림보였다. 이것이 상병장 때는 크게 문제가 안 됐지만 문제는 이병, 일병 때였다. 툭하면 선임들한테 욕을 바가지로 먹고 자주 구타를 당하기도 했었다. 생각할수록 쓰면서도 입으로는 욕을 씹지만 그래도 다시 생각해보면 덕분에 지금은 조금이라도 더 빨라진 것 같기도 하다. 욕을 먹기는 했어도 군 생활 중에 내 ‘스피드’한 행동이 빛을 봤던 적도 있었다. 지금도 그 때를 생각하면 아찔하고 무슨 깡이었는지 모르겠다. 그 때의 이야기를 해주도록 하겠다.
모든 이야기는 처음이 있듯 나도 오래 전 얘기부터 해줘야겠다. 그 때는 군대야 때 되면 알아서 적당히 가겠거니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직 고등학생 때의 이야기이고 형이 군대있을 때의 이야기였다. 아무튼 그때만 해도 군대에 대해 별생각이 없었는데 형이 전역을 함과 동시에 나도 대학생이 되었다. 지금은 눅눅한 아저씨가 되었지만 당시에는 파릇파릇한 12학번 새내기였다. 솔직히 그때나 지금이나 겉으로는 별로 달라진 것 없지만 넘어가도록 하자. 어쨌든 나는 형을 따라 목포대학교에 왔고 2학년으로 복학한 형과 함께 자취를 하게 되었다. 그 동안 서로 보지 못하다가 둘이서 같이 생활하게 되자 얘기도 많이 나누게 되었는데 형의 군 생활 얘기도 주요 이야깃거리 중에 하나였다. 생생하게 전해지는 강원도 철원의 한파와 국군장병들의 눈물없이는 들을 수 없는 애환이 서린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강원도에 대한 공포가 쌓여갔다. 속으로, ‘아, 나는 절대 강원도로 안 가야지.’라고 생각했다. 솔직히 형과 동생을 연속으로 같은 곳으로 보낸 다는 게 참 웃기지 않은가? 그래서 설마 거기로 가겠어, 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입영신청일자가 다가왔다.
떨리는 마음으로 목포대 근처에서 가장 빠르다는 PC방에 일찌감치 자리를 잡았다. 마음을 달래기 위해 가볍게 게임을 한판하려다 보기 좋게 진 다음 더 침울해진 마음으로 입영일자를 선택하기 위해 마우스를 잡았고 다시금 전의를 불태우며 눈을 매와 같이 빛내며 기다렸다. 그리고 여기서 나의 속 터지는 ‘스피드’가 발목을 잡았다. 원래는 3월에 군대를 가기를 원했는데 인원초과에 밀리고 밀려 당황한 나머지 되는대로 마구 클릭하다 7월 2일로 입영날짜를 찍었던 것이다! 학과동기들과 같이 사이좋게 3월에 입대해서 전역도 같이하기로 했었는데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된 것이다. 한 숨을 쉬면서 소집장소를 봤는데…. 이럴수가, 306이라니! 하고 많은 곳 중에 306이라니! 형도306이었는데 나까지 306이라니! 눈물이 앞을 가리고 식음을 전폐….하려 했으나 역시 몸은 살아야겠던지 그건 안되었다. 어쨌든 나라잃은 슬픔을 느끼며 2학년 1학기를 그렇게 보냈다. 그리고…. 마침내 대망의 입대날짜가 다가오자 마음을 다잡고 학교 앞 미용실에서 머리를 밀며 싸나이의 호연지기를 다시금 불태웠다. 당시 입대날짜는 10일 가까이 남아있었지만 일찌감치 머리를 밀었다. 그러니까 조금 덜 떨렸다. 그리고 하루하루가 갈수록 떨리는 마음은 사그라들고 오히려 군대에 대한 기대가 부풀어 올랐다. 그리고 입대 하루 전날, 서울의 외할머니 댁에서 하루 폐를 끼치고 다음 날 아침 의정부 306보충대로 들어갔다. 길고 길었던 군 생활의 시작이었다.
보충대에서 3일, 25사단 신병교육대(다행히 형 따라서 3사단으로 가지는 않았다.)에서 7주를 거쳐 자대로 가게되는 스펙타클하고 다이나믹한 서스펜션 액션블록버스터급 드라마를 이야기를 해주고 싶지만 말이 길어질것 같아 생략하고 바로 자대로 넘어가겠다. ‘스피드’하게 말이다. 신병교육대에서 4주의 훈련을 마치고 나면 마지막 4주 째 토요일에 자대를 선정받게 된다. 여기서 자대라고 하면 앞으로 전역할 때까지 사고를 치지만 않으면 자신이 있게 될 부대이기에 이 순간의 선택이 매우 중요했다. 나는 친하게 지내던 ‘하얀마음’(나는 108번 훈련병이어서 별명이 108요괴였고 내 다음번 녀석은 ‘하얀마음’백구였다.)과 같은 부대를 가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내가 있던 25사단은 전방사단으로 GOP근무가 대다수였고 나도 녀석과 같이 무난하게 그쪽부대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 나의 군 생활에 엄청난 분기점이 되는 선택지가 나타났다. 저 너머에서 나의 번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나름대로 ‘스피드’하게 관등성명을 외치며 그 쪽으로 달려갔다. 그곳에서 나는 상병까지 함께 했던 놈을 운명처럼 만났다. 놈은 나와 같은 훈련병이었고 당시에는 놈보다는 눈앞의 로봇처럼 단단해 보이는 사람에게 집중했다. 직감적으로 그 옆의 입이 가벼워 보이는 쥐상의 사람보다는 이 사람이 높은 사람이다는 것을 느꼈다. 그러고 있자, 갑자기 쥐가 입을 열었다.
“아, 본 중대장이 너희 프로필을 살펴봤는데 말이야, 햐, 또 이렇게 우수한 인재들이 올해는 많네. 혹시 수색중대라고 들어본 적이 있나?”
로봇이 아니라 쥐가 중대장이었다는 사실보다 수색대라는 말에 더 전율이 일었다. 수색대! 진짜 싸나이들만 간다는 대한민국 최고의 엘리트부대!(인거는 잘 모르겠지만)그리고 이어지는 설명들 하나하나가 나의 귀를 지나 그대로 여과없이 대뇌를 마구마구 자극했다. 가족같은 분위기의 부대생활, 모든 것이 투명하게 운영되는 부대정책, 선임들의 강요에 의한 암기식 교육이 아닌 자율의지에 맞기는 자기주도적학습, 7가지 무기를 활용한 전투기술, 독수리 흉장과 공수마크를 통한 타 부대와 비교를 불허하는 완벽한 밀리터리 패셔니스타가 될 수있는 기회등등…. 특히나 2개월의 GP생활이 끝나면 2개월동안은 부대에서 휴식을 취하며 다른 부대보다 휴가도 월등히 많이 준다는 것이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당시에는 GP가 무엇인지는 몰랐지만 2개월을 있고나면 가족같은 분위기의 부대에서 2개월을 그냥 쉴 수 있다는 말에 수색중대를 가기로 결심했다. 그러고 나니 나와 함께 있던 다른 훈련병들이 눈에 들어왔다. 선발인원은 4명인데 인원은 8명! 나는 누구보다 ‘스피드’하게 소리쳤다. “제가 가고 싶습니다!”라고. 그러자 눈치를 보던 다른 얘들도 앞다투어 자신이 가겠다며 손을 들고 소리쳤다. 그러자 인자한 얼굴의 중대장님이 흐뭇하게 웃으시면서 좋은 선택을 했다며 악수를 해주셨다. 그리고 지옥이 시작되었다.
자대생활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안 좋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쥐상의 중대장은 사단에서도 입으로 바벨탑도 쌓을 수 있을 정도로 아부와 입담이 좋기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결국 그의 감언이설에 속아서 이 힘든 고생을 하게 된 것이다. 물론 자부심이 느껴지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그의 말처럼 수색중대는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는 특수부대인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가족같은 분위기와는 거리가 멀어도 안드로메다급으로 멀었다. 구타, 욕설, 인격모독에 정말 하루하루가 절망적이었다고밖에 할말이 없었다.GP에서의 생활은 더 힘들었다. 밑에서는 다른 간부들이라도 많았지, 위에는 간부라고는 4명이 전부였다. GP는 민통선을 넘어, GOP철책을 넘어, 흔히 우리가 38선이라고 부르는, 군사분계선에서 불과 1km도 떨어져있지 않는 곳에 있는 작은 교도소처럼 생긴 일종의 요새진지였다. 생활의 대부분은 벙커에서 했고 4명뿐인 간부들 몰래 집단구타를 할 수 있을 만큼 벙커의 개수는 많았다. 어지간히도 많이 맞았던 것 같다. 또 그 죽일 놈의 ‘스피드’가 문제였다. 앞서 얘기했던 놈보다 암기하는 속도가 떨어져서 정말 죽고 싶을 만큼 맞고 욕을 먹었다. 놈은 컴퓨터게임학과에 롤 다이아 1티어였다! 여기서 대한민국 상위 0.008%의 실력자를 만난 것도 놀라웠지만 그보다는 놈이 얄미워 미칠 것 같았다. 괜히 상대적 박탈감이 느껴졌다. 매일 한 번씩 하는 각종 상황조치훈련은 무거운 중기관총과 탄약을 들고 뛰어야하는 나의 속도로 따라가기가 정말 버거웠다. 하루하루가 절망적이었고 하루에도 수십번씩 자살생각이 머리를 맴돌았다. 집에 하루에 한 번씩 하던 것도 이틀에 한번, 나흘에 한번, 일주일에 한번, 한달에 한번으로 점점 줄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할지 두려웠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