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살던 고향은 이기영의 고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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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나의 살던 고향은...
- 이기영의 『고향』 -

이기영의 『고향』은 이기영의 첫 장편으로, 그 당시의 농촌 현실을 사실적으로 표현하여 구체적인 농민의 삶을 보여주는 리얼리즘적 소설이다. 『고향』은 1920년대 한국의 전형적 농촌인 원터마을을 무대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동경에서 유학을 하고 돌아온 김희준을 중심으로 한 농민, 소작농과 마름인 안승학 사이의 계급적 갈등이 뚜렷하게 나타나있다. 또 자본주의의 유입으로 원터마을에도 공장이 들어서고 농민의 자식들이 공장의 노동자로 변하게 된다. 이 소설에서는 이러한 여러 이야기를 통해 마을의 생활과 주민의 심성의 변화까지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고향』은 결말에 있어서, 카프에서 요구하는 도식에 맞추기 위한 작위성과 도식성을 한계로 지적받고 있지만, 그럼에도 사회주의 리얼리즘 소설에 있어서 최고의 소설로 평가되고 있다.

▶ 민촌 이기영의 생애와 작품 세계
민촌 이기영은 1895년 5월 6일 충남 아산에서 태어나 서너 살 때 부유한 친척이 사는 천안으로 옮겨 성인이 되기까지 그곳에서 자랐다. 민촌의 집은 가난했는데, 민촌이 훗날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고하며 특징짓는 것은 바로 그 ‘가난’에 대한 강렬한 인상이다. 민촌은 열 한 살이 되던 해에 어머니를 잃고, 열 아홉 살이 되던 해에 할머니와 아버지를 연이어 잃는다. 그 후 민촌은 논산영화여고의 교사, 호서은행의 직원 등으로 방랑을 하다가 1924년에 ‘개벽’의 현상공모에 「오빠의 비밀 편지」로 입선하며 본격적인 작가 생활을 시작한다.
“민촌의 웃음을 누가 보았느냐”, “무언무소” 안석주, 「무언무소의 민촌 이기영씨」, 조선일보.
라고 당대인들은 민촌을 평하였는데, 이 말들로 미루어보았을 때 민촌은 우울하고 고독한 성격을 가졌음을 추측할 수 있다.
계급문학운동 중 농민문학 확대에 꾸준히 노력했던 이기영은 1931년에 카프 제 1차 검거 때 구속되었다가 집행유예로 풀려났으나 1934년의 카프 2차 검거 때에는 형을 받고 2년여의 옥살이를 경험하기도 하였다. 해방과 함께 월북하여 ‘북조선예술총동맹’을 이끈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후로 꾸준한 창작활동을 펼쳐오다가 1984년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농민문학은 농촌의 현실을 배경으로 농민의 삶을 그린 작품이다. 일제 강점기에 토지 수탈로 인한 극대화된 농민들의 절대적 가난과 그에 따른 계급간의 갈등, 자본을 둘러싼 비인간화 등에 중점을 두어 비평정신과 목적의식을 수반한 문학이다. 농민 계몽 문학, 농민 운동 문학. 전원중심주의 소설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이기영의 『고향』은 농민 운동 문학의 계급 투쟁형 소설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브나로드 주창자들과 달리, 문화 운동으로서의 농민 계몽보다는 경제 투쟁으로서의 농민 운동을 강조하고 있다.
1933년~1934년 동안 조선일보에 연재되었던 『고향』은 리얼리즘, 가난, 농촌 현실이라는 키워드로 읽어나갈 수 있는데, 이것은 민촌의 생애와도 무관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극도로 가난한 소년기를 보내고 동냥글로 글을 익히다가 부모와 조모를 일찍 잃었던 그의 생애 전반에 짙게 깔려있던 것은 가난에 대한 깊은 고찰과 가난한 현실, 그 현실을 좀 더 사실적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욕구였던 것이다. 그 뿐 아니라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 또한 다른 여러 가지의 대립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써 궁극적으로 민촌이 『고향』을 통해 던지고 싶었던 질문은 ‘왜 가난한 사람이 생겨나는가? 왜 가난한 사람은 가난해야 하는가?’ 였던 것이다. 같은 맥락으로 보았을 때 그가 해방 직후에 월북을 선택하였던 것은 그러한 욕구가 이념적으로 표출 된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