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스토텔레스 - 교과서 적용 - 2 절제하는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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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아리스토텔레스
인생을 왜 살아야 하는가? 어떤 것들을 추구하며 살아가야 하며, 그렇게 살기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는가? 굉장히 거대한 인생 담론이 아닐 수 없다. 나란 사람은, 본시 태어나길 배고픈 소크라테스보다 배부른 돼지가 되기를 자처한 사람이므로, 이러한 고민들을 질풍노도의 시기라 하는 사춘기에 조차, 해본 적이 없다. 하지만, 대학을 들어오고(나름 지성인의 대열에 끼다 보니) 사실, 연애를 하면서, 본질적 자아에 맞서면서부터 시작된 이러한 고민들은, 너무나 괴롭게 했다. 그러던 중, 비교적 쉽게 나에게 다가선 철학자는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였다.
‘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과 선택은 어떤 좋은 것을 목표로 한다’ ≪니코마코스 윤리학≫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좋은 것인가? 즉 선의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현실주의자였던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스승이었던 플라톤(위 그림의 붉은 상의로, 손을 위로 향하고 있었으며, 이상주의자)과는 달리, 실현 불가능한 선을 참된 선으로 인정하지 않고, 인간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것도 선이라고 인정하지 않는다. 선은 이 세상의 일이며, 따라서 그것은 삶의 완성과 함께 온전함과 관련되어져야 한다고 했다. 따라서 자연스레 우리의 아리스토텔레스는 현실적인 의미로서의 선, 즉 다시 말하여, ‘좋은 삶’을 기준으로 삼는다. 아하! 좋은 삶이라. 언뜻 듣기엔 무척 좋은 말인 듯 했다.
이런 그럼 어떤 삶이 좋은 삶일까? 나 같은 사람은 아우디 티티를 살 수 있는 능력을 갖는 것이 바로, 선이 될 것이며, 또 어떤 이는, 닭도리 탕을 맘껏 먹는 것이, 바로 선이 될 수도 있을 텐데 말이다. 즉, 선은 한 가지가 될 수 없는 것이었다. 또한 아우디 티티를 사고자 하는 나의 내면 상태를 분석해 보면, 아우디 티티는 그것 자체로 목적이기도 한 동시에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죽고 살기 싫다는 목적의 수단이 되기도 한다. 이와 같이, 그 순간에는 목적이지만, 다음 순간에는 수단이 되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너무 애매한 것이 아닐까?
이때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미 나와 같은 사람들을 간파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추구하는 것의 마지막인 최고의 목적은 과연 존재하는가? 그리고 존재한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이 질문에서 최고의 목적을 최고선‘이라는 단어로 바꾼다. 그리고 그는 나아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최고선은 바로 행복이라는 것에 일치된 의견을 보인다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다. 그가 제시한 행복이란 것이 과연 최고선이라고 볼 수 있는 가라는 의문이 든다. 그는 이를 밝히기 위해서 최고선의 기준을 만들어서 그 기준에 들어맞는 가를 검토한다. 첫 번째, 최고선은 우리 인간이 오직 그것을 위하여 추구하는 목적이어야 한다. 두 번째, 최고선은 무조건적으로 완전해야 한다. 즉 최고선은 오직 그 자체로서만 가치를 지니며, 다른 어떤 것에 대한 수단이어서는 안 된다. 세 번째, 최고선은 만족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그 결과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이 이러한 최고선의 세 가지 조건에 모두 맞는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만일 행복이 최고선이라고 한다면, 도대체 이 행복이란 정확하게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에게 고유한 일과 기능’을 탐구하면 그 답을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인간의 고유한 일과 기능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인간만의 고유한 기능은 이성 활동이라고 했다. 물론 인간에게는 이성 활동 외에 예를 들면, 먹고 마시는(영양섭취의) 기능 혹은 감각운동과 같은 다른 기능들도 존재한다. 하지만 다른 기능들은 동물에게도 존재하므로, 인간고유의 활동이라고는 볼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오직 이성의 활동만이 인간의 고유활동으로 보았고, 인간의 행복은 이러한 인간의 이성 활동에 기반한 관조하는 생활, 즉 정신활동에서 얻어진다고 보았다.
그리고 인간의 정신활동을 담당하는 영혼의 이성적인 부분은 도덕적인 덕을 실현하기 위해서 욕망을 통제한다. 그리고 욕망의 통제를 규칙적으로 반복하다 보면 덕에 습관이 붙게 된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덕을 ‘내제화된 중용’이라고 규정하였다.
덕? 새로운 단어가 등장한다. 그는 덕을 도덕적인 덕과 지적인 덕으로 구분 지었다. 지적인 덕의 예로는 지혜, 이해력, 지성을, 도덕적인 덕의 예로는 절제, 관용, 인내, 용기, 관후, 정의 등을 든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덕에도 위계를 정하였는데, 지적인 덕을 도덕적 덕보다 우월하다고 보았다. 그럼에도 그는 도덕적 덕에 대해서 굉장히 자세하게 논의 한다. 모든 인간은 완벽한 도덕적 본성과, 성향을 갖추고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아, 덕은 교육을 통해서 얻어져야만 한다고 보았으며, 꾸준한 훈련과 실천을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다고 보았다.
“ 정의로운 행위를 함으로써 정의로워지며, 절제 있는 행위를 함으로써 절제 있게 되며, 용감한 행위를 함으로써 용감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