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철학통사 - 『학문의 제국주의』폴A 코헨 - 제 3장 제국주의 - 신화인가 현실인가(전반부- p238~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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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철학통사 - 『학문의 제국주의』폴A 코헨 - 제 3장 제국주의 - 신화인가 현실인가(전반부- p238~259)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동양철학통사
『학문의 제국주의』폴A. 코헨
제 3장. 제국주의 - 신화인가 현실인가 (전반부: p238~259)
목 차
1. 이데올로기로서의 근대화론
2. 베트남 전쟁과 중국 연구
미국의 중국 근현대사 연구자들은 지금까지 제국주의imperialism 라는 용어를 두 개의 기본적으로 다른 방법으로 사용해왔다. 일찍이 마오쩌둥은 “근대 중국의 역사는 제국주의자들의 침략의 역사이며, 제국주의자들이 중국의 독립과 자본주의적 발전을 방해해온 역사이다”라고 잘라 말했는데, 중국 근현대사 연구자 중에도 급진파에 속하는 일부 사람들은 제국주의를 광범하고도 포괄적인 현상으로 파악하려고 했다. 그들은 아편전쟁에서 공산당의 승리에 이르는 1세기 동안 중국이 안고 있었던 문제들은 궁극적으로 제국주의에 그 원인이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제국주의를 주축으로 중국 근현대사를 해석하는 입장을, 제국주의접근법이라 부르기로 한다. 급진파에 속하지 않는 연구자라 하더라도, 제국주의에 의해 모든 것을 설명하는 것 자체에는 이의를 제기하면서도 제국주의가 한정된 범위의 어떤 역할을 했다는 점을- 특히 그것은 정치의 영역에서 현저한데- 인정하는 데에는 결코 인색하지 않았다. 제국주의를 어떤 측면에서 문제삼건 간에, 근대화이론은 그 기원, 전제하고 있는 가정들, 그리고 수행한 지적인 기능에서 그 논의와 깊이 연관되어 있는 것이다.
이데올로기로서의 근대화론
제 2장에서 중국 근현대사에 대한 근대화 접근법을 기본적으로는 학문적 혹은 분석적인 틀로 다루었다. 근대화 접근법은 주로 미국의 사회 과학자들의 손에 의해 본격적으로 개발되었으며, 명확하게 정식화된 것은 제2차 세계대전(1939년~ 1945년) 이후의 일이다. 이 이론의 전제에 깔려 있는 서양이나 중국 혹은 문화변동에 대한 다양한 생각의 기원은 19세기 또는 그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고 많은 경우 눈에 띄지 않는 방식으로 우리의 중국사 이해에 심각한 왜곡을 가져다주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근대화이론 및 그것에 부속된 용어체계를 폐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제 2장에서 학문적 근거에 기초하여 결론을 내렸던 것이다.
1960년대 말 베트남에 대한 미국의 군사 개입의 강화와 그것이 불러일으킨 감정의 소용돌이를 배경으로 중국 근현대사에 대한 근대화 접근법은 전혀 다른 근거에 기초하여 비판되기에 이르렀다. 포문을 연 것은『아시아학회보』1969년 10월호에 게재된 제임스 펙James Peck의 논문「레토릭의 기원: 미국의 중국 전문가들이 가진 직업적 이데올로기」라는 제목의 논문에서 펙은 근대화이론은 단순한 학문적 성격의 이론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학문적 이해에 머문다면 근대화론은 잘못되어 있긴 해도 사회에 해악을 끼치지는 않는다. 그에 의하면 근대화론은 오히려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띤 이론, 즉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아시아에 대한 미국의 정치적 · 군사적 · 경제적 개입을 정당화하기 위해 지도적인 중국 전문가들에 의해 사용된 이론에 다름 아닌 것이다. 펙이 열거한 근대화론의 이데올로기적 성격은 반反공산주의이며, 엘리트 중심으로 사회를 파악한다. 사회의 변혁을 달성하기 가장 좋은 수단으로서 혁명보다도 개량에 더 비중을 둔다. 그리고 미국의 제도나 가치 혹은 미국이 궁극적으로 선善이라는 것에 대해 최대한의 신뢰를 보이고 있다. 펙에 의하면 그와 같은 성격을 갖는 근대화론은 한편으로는 비동정적 내지 적대적, 혹은 기껏해야 보호자 의식으로 가득 찬 중국혁명관을 초래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미국 제국주의의 실재를 어떤 의문도 품지 않고서 부장하는 태도를 낳았던 것이다. 근대화이론은 중국을 설명하는데 실패했다. 더 문제가 되는 것은 근대화이론은 미국의 폭력과 야만을 정당화하고 2차 대전 후의 세계에서 미국이 휘두른 권력의 본질과 목적을 가렸던 것이다. 또 중국 전문가들의 근대화 접근법은 현 시점에 있어서의 미국 제국주의적 행동을 은폐했을 뿐만 아니라 과거 1세기 반의 중국사에서 제국주의가 한 역할을 중대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도록 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펙에 의하면 미국의 중국 전문가들은 제국주의를 중국인의 환상이나 신화 내지는 상처 입은 마음의 고통을 심리적으로 무마하는 진통제와도 같은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즉 중국전문인들에게는 중국이 19, 20세기에 희생당했다는 뼈아픈 의식이 있으며, 그 원흉을 근대사라는 막연한 것이 아니라 보다 명확한 무언가에서 찾으려고 했다는 것은 감정적으로 무리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설명이다. 제국주의는 중국인의 관념 속에서 존재하는 것이지, 결코 현실에 존재한 것은 아니라는 식이다.
펙은 이러 견해에 반대했다. 그의 제국주의 해석에 의하면, 제국주의는 현실에 존재했을 뿐만 아니라 과거 1세기 반 동안의 중국의 역사를 설명하는 열쇠이다. 그는 “중국이 서양 열강에 의해 극히 장기간에 걸쳐서 지배당한 주요한 원인은 중국 자신에 있다는 중국 전문가들의 확신”에 의문을 던졌다. 그런 시각을 대신하여 펙은 잭 벨던Jack Belden을 원용하면서 1949년 이전에 “중국혁명이 성취되지 못한 것은 제국주의의 매력이 너무나도 강대해서 중국 인민들의 자신들의 운명을 스스로 결단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는, 단순하고 명쾌한 이유 때문”이라고 주장하며, 또 “중국은 일본과 다르며, 필요한 문화적 배경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서양 제국주의의 전면적 공격에 노출되어버리고 말았다”는 중국 전문가들의 견해도 거부하고, 오히려 그것을 뒤집어 놓은 것이 진실에 가깝다고 주장했다. 즉, “중국은 서양 열강들로부터 전면적인 충격을 받았으며, 그 때문에 반응할 수 없었던 것”이고, 한편 “일본이 제국주의의 지배를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일본의 전통문화가 서양식 변혁을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을 특별히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어느 정도 까지는 “국제환경이 때마침 일본에 유리했다는 사정 때문이었다.”
근대화 접근법과 제국주의 접근법은 서양 경제력의 중국 침투를 강조한다는 점에서는 서로 공통되어 있다. 다만 근대화 접근법에 입각한 사람은 그 영향을 중국에 유익한 것이라 생각하고, 제국주의 접근법에 입각한 사람은 그 영향을 유해한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때문에 에드윈 라이샤워는 일찍이 식민지 내지 반식민지였던 아시아 국가들이 안고 있는 ‘경제적 비극’은 그들 국가들이 ‘경제적 제국주의’에 시달렸기 때문이 아니라 고정자본투자라는 형태의 ‘경제적 제국주의’의 은혜를 충분히 받지 못한 데 있다고 주장한다. 펙은 거기에 반대하여 “제국주의에 관한 제 이론이 밝힌 바에 의하면, 자본 수출과 외국시장의 지배는 제국주의가 외국을 조종하고 지배하는 고전적인 수법이며”, “나아가서는 무역 그 자체조차 후퇴 효과를 가져 오거나 혹은 정체나 억압 상태에 머물러 있는 힘을 강화하기도 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한다.
펙에 주요한 표적인 된 존 페어뱅크는 『아시아학회보』1970년 4월호에 펙에 답하는 글을 발표했다. 그는 “우리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의견에 둘러싸여 있다. 그 견해는 미국의 중국 연구가 최악이 된 이유를 미국 자신이 세계에 발을 지나치게 뻗었다는 사실에서, 즉 미국 제국주의 혹은 적어도 미국 내부, 그러므로 우리 자신의 내부에서 찾고 있다”고 했다.
페어뱅크는 몇 개의 논점을 제기했다. 그는 먼저 펙이 ‘근대화론’과 ‘혁명적 마르크시즘’을 충분히 정확하게 구별하고 있지 않다고 비판했다. 펙은 근대화론과 혁명적 마르크시즘을 학문적으로 양자택일의 관계에 있는 이론이라 했는데, 그것은 완전히 사실과 다르다는 것이다. 페어뱅크에 의하면 근대화론은 기본적으로는 순수 학술용 이론으로서, “다양한 단편적 사실을 끌어 모아 분석하려는 것”이며, 중국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사람이 그야말로 중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태를 설명하려 할 때 사용하는 도구에 다름 아니었다. 혁명적 마르크시즘은 그것과는 대조적으로 “긴밀하게 구성된 포괄적인 이론으로 실천을 추구하는 것이며, 아시아 국가 사람들이 그들 자신의 혁명적 목적을 위해서 채택하는 교의敎義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페어뱅크에 의하면 근대화론과 혁명적 마르크시즘이 설령 학문적 해석의 기본틀이라는 공통된 장치로 파악되는 경우에도 과연 양자택일의 관계에 있는가 하는 물음에 답하는 것은 무척 이나 어려운 문제였다. 그는 양자를 이른바 부분과 전체의 관계로 구별했다.” 근대화론을 근대에 일어난 일들을 설명하는 이론이라는 식으로 넓은 의미로 본다면, 이론으로서의 마르크스-레닌주의는 다양하게 있는 근대화론 중 하나의 이론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