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과학 김영랑의 삶과 시 세계

 1  인문과학 김영랑의 삶과 시 세계-1
 2  인문과학 김영랑의 삶과 시 세계-2
 3  인문과학 김영랑의 삶과 시 세계-3
 4  인문과학 김영랑의 삶과 시 세계-4
 5  인문과학 김영랑의 삶과 시 세계-5
 6  인문과학 김영랑의 삶과 시 세계-6
 7  인문과학 김영랑의 삶과 시 세계-7
 8  인문과학 김영랑의 삶과 시 세계-8
 9  인문과학 김영랑의 삶과 시 세계-9
 10  인문과학 김영랑의 삶과 시 세계-10
 11  인문과학 김영랑의 삶과 시 세계-11
 12  인문과학 김영랑의 삶과 시 세계-12
 13  인문과학 김영랑의 삶과 시 세계-13
 14  인문과학 김영랑의 삶과 시 세계-14
 15  인문과학 김영랑의 삶과 시 세계-15
 16  인문과학 김영랑의 삶과 시 세계-16
 17  인문과학 김영랑의 삶과 시 세계-17
※ 미리보기 이미지는 최대 20페이지까지만 지원합니다.
  • 분야
  • 등록일
  • 페이지/형식
  • 구매가격
  • 적립금
자료 다운로드  네이버 로그인
소개글
인문과학 김영랑의 삶과 시 세계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김영랑의 삶과 시 세계
목차
Ⅰ.서론-p.1
Ⅱ.김영랑의 생애-p.1
Ⅲ.김영랑의 시 세계-p.5
Ⅳ.문학사적 위치-p.14
Ⅴ.결론-p.17
Ⅵ.참고문헌-p.17
Ⅰ.서론
김영랑은 잘 다듬어진 언어로 섬세하고 영롱한 서정을 노래하며 순수서정시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시인이다. 김영랑 시인의 시는 경향시 위주였던 당시 문단에 신선한 충격을 주고, 시에 대한 인식을 변화시킨 것으로 알려져있다. 그러나 김영랑 시인은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순수 서정시만 쓰지 않았다. 시대적 현실과 내면간의 갈등을 다룬 작품이나, 시대에 대한 부정적 시각이 담긴 작품도 있다. 이 연구에서는 김영랑의 다양한 시문학을 살펴봄으로써 김영랑 시인의 생애-시대적 배경-와 관련지어 시세계를 탐구해보도록 하겠다.
Ⅱ.김영랑의 생애
(1)시인의 고향 강진
훗날 ‘1930년대 전반기 우리 시문학의 가장 큰 빛 서정주의 평: 김현, 1981, 193
’의 하나로 찬사를 받게 되는 시인 영랑 김윤식은 1903년 1월 16일 전남 강진군 강진면 남성리 탑골 마을의 북산 아래에서 태어났다. 영랑의 아버지 김종호는 500석 정도를 거두어들이는 상당한 규모의 지주로서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강진 고을의 유지였다. 강진 고을 부농의 5남 3녀 중 맏아들로 태어난 영랑은 유년기에 동네친구들과 어울려 뒷산의 바위나, 집 주위의 감나무 밭이나 동백나무 숲을 놀이터로 삼아 성장하였다. 영랑은 1909년 봄부터 북산골에 있는 서당에 다니기 시작하였고, 그로부터 2년 후인 1911년에는 강진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여 1915년에 졸업하였다. 그의 나이 열세 살 때인 1916년에 김은하와 결혼하였으나 다음해에 곧 사별하게 된다.
영랑의 생애와 문학에 있어서 그의 고향 강진이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다. 영랑은 그의 생애 중에서 7년 정도의 유학 기간과 말년의 2년간 서울 생활을 제외하면 40년 가까운 세월 동안 고향 강진 땅에 살면서 주옥같은 서정시를 써낸 대표적인 ‘강진시파’ 시인이다. 강진 지방은 남도 특유의 고유문화를 독자적으로 꽃피운 지역으로 강진 고을의 자연과 삶은 영랑의 시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강진의 ‘이상적 남국 풍토’는 영랑의 시문학을 탄생시킨 모태에 해당되며, 「찬란한 슬픔의 봄」(1981)이라는 글에서 비평가 김현이 평한 바와 같이 전라도 사투리는 영랑의 시에 적절하게 수용됨으로써 우리 현대시의 중요한 자산으로 자리 잡게 된다. 「시와 감상」(1938)에서 정지용은 영랑의 시를 통하여 비로소 전라도 사투리가 매우 곡선적이고, 감각적이고, 정서적인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고 술회한 바 있다.
(2) 휘문의숙 재학 시절
1916년 2월 초에 상경하여 1년 정도 기독청년회관에서 영어를 공부한 바 있는 영랑은 이듬해인 1917년 3월 휘문의숙에 진학하게 된다. 3학년 재학중이던 1919년 봄에 영랑은 3*1운동에 가담한 죄로 일본 경찰에 체포 구금되었다가 석방된다. 그리하여 고향으로 내려가지만 그곳에서도 독립 만세운동을 모의하다가 검거되어 대구형무소에 복역하다가 석방되는 등 많은 고초를 겪기도 하였다. 그해 가을에 결국 휘문의숙을 중퇴하기에 이른다.
휘문의숙은 영랑의 문학적 생애에 있어서뿐만 아니라 우리 현대문학사에서도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중등 교육기관이었다. 영랑이 재학하고 있던 1910년대 후반기 당시 휘문의숙에는 장래 우리 문단을 이끌게 될 우수한 인재들이 여러 명 재학하고 있었다. 영랑의 바로 위 학년에 박종화가, 그 위 학년에는 홍사용이 있었다. 그리고 영랑의 바로 아래 학년에는 정지용이, 그 아래 학년에는 이태준이 재학하고 있었다.
휘문의숙 출신 문인들과 함께 1920년대 이후의 우리 문단을 이끌었던 대표적인 또 다른 학맥으로 배재고보 출신 문인들을 빼놓을 수 없다. 나도향, 김기진, 박영희, 박용철, 김소월 등이 대표적인 배재고보 출신 문인들이다. 이들 중에서 당대 문단에 커다란 영향력을 미쳤던 문인으로 비평가였던 김기진, 박영희, 박용철이 특히 주목된다. 박영희와 김기진은 1920년대 중반기 이후 우리 문단에서 프로문학 운동을 이끌어 가는 중심인물로 자리를 굳혀 갔다. 그러나 그들과 동기생이었던 전남 광산 출신 박용철(1904~1938)은 오히려 휘문의숙 출신이었던 영랑과 더 가까운 사이가 된다. 동경 유학 시절에 영랑과 박용철은 청산학원 중학부 동기생으로 맺어지는 것이다.
오늘 본 자료
더보기
  • 오늘 본 자료가 없습니다.
해당 정보 및 게시물의 저작권과 기타 법적 책임은 자료 등록자에게 있습니다. 위 정보 및 게시물 내용의 불법적 이용,무단 전재·배포는 금지되어 있습니다. 저작권침해, 명예훼손 등 분쟁요소 발견 시 고객센터에 신고해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