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소월과 한용운의 시의 특징과 의미 김소월 생애, 김소월 문학적 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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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김소월과 한용운의 시의 특징과 의미 김소월 생애, 김소월 문학적 편력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한 국 문 학 사]
김소월과 한용운의 시의 특징과 의미
목차
1. 여는 말
2. 김소월
(1) 생애와 문학적 편력
(2) 소월 시의 특징과 의미
3. 한용운
(1) 생애와 문학적 편력
(2) 만해 시의 특징과 의미
4. 맺는 말
1. 여는 말
1920년대 시의 위상과 흐름은 크게 세 갈래, (1) 낭만주의 시 (2) 현실 수용과 그 비판의 사회시 (3) 민요시로 나눌 수 있다. 낭만주의 시의 특징은 감정의 과도한 표출과 퇴폐적 현실도피적 성향으로서 가히 ‘병적’인 모습을 보였으며, 그 같은 낭만시에 대한 비판적 태도와 식민지 현실의 비참함과 무산 대중에 대한 뜨거운 관심을 표방한 사회시는 KAPF로 그 정점에 이른다. 서구의 영향을 받은 기존의 자유시 형식에 대한 회의와 불신으로 시작된 민요시는 조선 민족의 정신이 담긴 노래이며 민중의 소박한 삶에서 태어난 민요에 대한 관심과 함께 전개되었다. (감태준, p 129 ~p 135) 이러한 시적 실험 내지 시운동들이 공존하는 가운데 ‘자유시 형식을 최초로 정립’한 이는 주요한이다. 그의 시집 (1924)은 그 ‘시적 언어와 리듬에 대한 감각’이 돋보이는 바, 그것은 ‘외래의 영향을 넘어서 한국어의 특성에 맞는 새로운 언어적 율격의 표현을 위한 노력’의 결실이었다. 하지만 그는 점차 시조 창작에 몰두하고 김억과 마찬가지로 전통지향의 시풍으로 회귀하는 과정을 보여줌으로서 일정한 한계를 보여주었다. (권영민, p244 ~ p250)
그 ‘주요한의 뒤를 이어 한국시가 과제로 짊어지게 된 두 가지 문제, 즉 식민지 현실을 직시하면서 한국인에게 새로운 비전을 보여줄 수 있는 새로운 시 형식을 찾는다는 어려운 문제와 씨름한 사람은 김소월, 한용운, 이상화’로서 이들의 ‘새로운 시 형태에의 욕구는 대체로 두 가지 유형으로 압축’ 되는 바 ‘하나는 시조에 버금갈 수 있는 새로운 정형시에 대한 욕구이고 하나는 시를 거의 완전히 해체해 버리려는 대담한 욕구’이다. 그것은 ‘자유시와 그것의 극단적 형태인 산문시에서 잘 드러나’는데 (김현, p 231 ~ p232) 김소월은 전자에, 한용운과 이상화는 후자에 해당한다.
1. 김소월 ( 1902 ~ 1934 )
(1) 생애와 문학적 편력
1902년 평안북도 龜城郡 西山面 외가에서 태어나 백일만에 본가인 定州郡 郭山面으로 돌아와 성장. 定州는 춘원 이광수와 김억, 이승훈을 배출한 곳이며 도산 안창호와 조만식 선생도 그 인근 출신이다. 1904년 (그의 나이 2세) 부친이 일본인에게 심한 폭행을 당하고 그로 인해 얻게 된 정신질환은 집안 전체에 그늘을 드리워 놓는다. 한편 그의 첫째 숙모 계희영은 어린 소월의 문학적 감수성 형성에 큰 영향을 준다. 1915년 (13세) 남산학교를 졸업하고 오산중학교에 입학. 교장 이승훈, 교사 조만식의 영향아래 민족의식을 키우고 안서 김억을 만나 詩作을 시작한다. 동네 어린 처녀 오순(吳順)과 마음을 나누곤 하지만 이듬해에 조부의 뜻을 어길 수 없어 세 살 연상의 홍단실과 결혼. 1919년 31 독립운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오산학교는 일제에 의해 폐교되고 소월은 일시 낙향한다. 이듬해 김억의 지도로 지에 을 발표하고 문단에 데뷔(18세). 김억에 따르면 , , ,등의 절창들은 거의 모두 오산학교 시절에 쓰여진 것이다. 편입해 들어간 서울 배제고를 졸업하자 바로 일본 유학을 떠났으나 관동대지진으로 조기 귀국. 나도향, 김동인 등과 교류. 1925년 시집 마침내 출간. 그는 이미 문단으로부터 크게 주목을 받는 시인이었다. 2년 전 에 박종화는 이런 평문을 썼다. ‘아마 그 시 속엔 얼마나 아름다운 기교가 있으며 얼마나 아름다운 조율이 흐르고 있으며, 얼마나 안타까운 정서가 솟는가. 우리 無色한 시에 이러한 작품이 있음을 기뻐하여 마지아니한다.’ 출간 이듬해(24세) 서울에서 첩첩 산골인 龜城으로 귀향. 마음 속 연인이었던 吳順의 죽음으로 충격을 받다. 이후 시작에는 거의 손을 떼고 시도한 두 어 가지 사업에 실패도 하며 방탕한 생활. 그 이듬해 나도향 요절. 다시 그 이듬해 이장희 자살. 1934년엔 그 자신 32세의 나이로 스스로 목숨을 끊다. 1968년 한국일보사 주선으로 탑골공원에 소월시비가 세워지다. (김영철, , 건국대학교 출판부, 1999년)
(2) 소월 시의 특징과 의의
① 권영민의 (I권)는 ‘민족 정서의 시적 발견’이란 중간 제목 하에서 소월을 첫 번째 시인으로 다루면서 그 소제목을 ‘김소월 시적 정서와 형식의 발견’으로 정리하고 있다.(p 268) 시적 정서는 내용(혹은 ‘시적 공간’ : 김현)과 관련이 있고 형식은 그야말로 그가 새로이 개척한 시형식을 말한다. 모든 문학작품에 대해서도 그러하듯 소월 시에 대한 탐구들 역시 크게 내용과 형식이라는 두 갈래로 나뉘어 전개된다. 예술에 있어서의 내용과 형식의 관계는 춤과 춤추는 사람처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하겠지만 분리 탐구는 통합적 이해에 더 잘 접근하기 위해서는 필요 불가결한 것이다.
② 시형식의 독창성 : 김소월의 문학적 성취 내지 문학사적 의의를 논함에 있어 빠짐없이 거론되는 것은 새로운 시형식의 발견이다. 소월은 무엇보다 ‘식민지 초기에 정형시에 가장 깊은 관심을 쏟은 시인’ (김현, p232)이다. 그의 시는 ‘구비문학의 청각적 전통에 대해 충실’한 시(유종호, p283)이며 ‘김억의 영향으로 민요시로써 출발하였으나 (…) 민요의 율조를 변형하여 독특한 시형식을 이룩’ (감태준, p215)한 시로서 그 시적 형식은 ‘전통적인 민요의 율조와 토속적인 언어 감각의 결합을 통해 이루어진 것’(권영민, p269)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