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화의 남해원정 정화 생애 정화 소개 정화 시대적 배경 정화의 남해원정 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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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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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정화의 남해원정
정화의 생애
그림 정화의 초상화
정화 (1371~1433)
중화 제국의 세계 질서를 만들기 위해 각지에 파견된 환관들 가운데 가장 화려하게 활약한 인물은 남지나해 인도양 해역의 원정 함대를 지휘한 정화였다. 그러나 『명사』의 정화전이 그의 삶에 대해 “정화, 운남인(雲南人), 세상에서 이르기를 삼보(三寶) 태감이라 한다. 처음에 연왕의 번저(藩邸)에서 일하다가 기병(起兵)의 공을 세워 태감으로 승진 한다”고 간략히 서술한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정화 개인의 삶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은 부분이 많다. ‘삼보’는 명 초에 특히 지위 높은 태감에게 부여 된 호칭이라는 설이 유력하며 특별한 의미는 없다.
정화 개인의 기록이 지극히 빈약한 이유는 그가 황제의 손발 역할을 하는 환관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화에 대한 사료가 극히 빈약하다.
거대한 체제가 무너질 때는 격변하는 시대의 물결에 휩쓸려 많은 비극이 생기기 마련이다. 정화도 몽골 제국의 붕괴라는 시대의 격랑에 휩쓸려 고뇌로 가득 찬 청춘을 보낼 수 밖에 없었던 중국 주재 외국인(색목인)이었다. 정화는 명나라가 세워진지 3년이 지난 1371년에 운남에서 태어났다. 이렇게 조용한 내륙의 농촌에서 태어난 정화가 시대의 격동 속에서 중앙으로, 바다의 세계로 밀려나 생각지도 못한 인생의 궤적을 그려 가게 되는 것이다.
12세 때 정화는 전란 중에 부우덕이 지휘하는 명군에게 잡혔고, 후에 영락제에게 환관으로 보내졌다고 한다. 당시 나이 13살 때의 일이다. ‘정난(靖難)의 변(變)’때 정화는 29세의 당당한 체격의 소유자로 몰라보게 성장해 있었다. 기록에 남아있길 “내시 정화, 즉 삼보는 운남 사람이다. 키는 9척이며 허리 둘레는 10위, 얼굴은 각이 지고 코는 작으며 참으로 귀상이다. 미목은 수려하고 귀는 희고 길며 이는 조개를 포개 놓은 듯하고, 호랑이처럼 걸으며 목소리는 낭랑하다. 나중에 정난의 공으로 내관의 태감 지위를 받았다”고 말한다. 키가 9척이라 했으니 요즘의 180cm에 해당하므로 그가 당당한 체격의 소유자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실제적으로는 정화가 환관이었기 때문에 미화된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하지만 이렇게 나중에라도 미화될 정도로 정화의 업적이 굉장히 크며 대단한 인물이었을 것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겠다.)
정난의 변에서 정화는 연왕(영락제)의 측근으로 군공을 세워 영락제와 강한 신뢰의 끈으로 묶이게 된다. 이후 1404년에 영락제에게 ‘정’이라는 성을 받아 ‘정화’라 일컬어지게 되었다. (본래 이름은 마화(馬和)다. 그의 아버지의 이름은 마합지 였다고 하는데, ‘합지’(哈只)란 메카 순례를 다녀온 이슬람교도에게 붙이는 존칭, ‘하지’인 듯하니, ‘마(馬)’란 본래 ‘마흐무드’ 또는 ‘알 마그레브’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중국에서는 황제가 신하에게 ‘성’을 내리는 일은 드물지 않았지만 환관에게 성을 내리는 일은 드물었으므로 정난의 변에서 그의 공이 매우 컸으리라 추측된다. 이렇게 환관으로서 정화의 지위는 확립되었다.
시대적 배경
영락제 시대는 명 초 이래의 농업 진흥책이 성공을 거두어 국력이 충실하던 시기였다. 『명사』 식화지(食貨志)·부역(賦役) 에서는 "이 때 우내(宇內:천하)백성의 부입(賦入)은 넘치고, 곡물 100만석이 경사(京師:남경)로 반입된 것 외에 부현의 곡물 창고는 참으로 풍족해서 썩어서 먹지 못하고 버리는 게 많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충실한 재정을 바탕으로 영락제는 적극적으로 외정(外征)을 거듭해 명나라의 국위 선양을 지향했던 것이다. 해상 무역에서 영락제는 홍무제가 정한 해금 정책을 계승했다. 황제는 민간 상인의 해외 도랑을 모두 금지했을 뿐만 아니라 민간에서 원양선을 건조하지 못하도록 하고, 이미 건조되어 있던 원양선도 국내 수송용 배로 개조하도록 명했다. 영락제는 민간 상인의 대외 무역을 억지하는 한편 조공 무역을 확대시켜 나갔다. 황제는 조선·월남(베트남)·섬라(시암)·진랍(캄보디아)·자바·소문답랄(수마트라의 파세) 등에 잇달아 사절을 파견하고, 1405년에는 일찍이 볼 수 없는 대규모 선단을 남해에 파견하기로 결심하고 이슬람 교도였던 정화를 함대 사령관으로 뽑았다. 정화가 인솔한 2만 7000명의 대함대는 이후 28년 동안 7차례에 이르는 대항해를 하게 되는데, 그 항해 거리는 약 10만 해리(약 18만 5000km)에 이르렀다.
제1차~7차 원정기
정화 함대의 항해는 제 1차~제3차 원정에서는 인도 서해안의 말라바르 지방의 중심 항구 도시 캘리컷으로 향하고, 제 4차~제6차 원정에서는 페르시아 만 입구에 위치하며 이 지역의 주요 항구 도시인 호르무즈를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