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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덕혜옹주(德惠翁主)를 감상하고
처음에는 이 영화를 의식적으로 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너무도 우연하게 영화를 보게 되었으며 이제는 참 보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대한제국이 망국의 길로 접어들 때 태어난 덕혜옹주(德惠翁主)는 1912년 5월 25일 조선의 제26대 왕이자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였던 고종과 귀인 양씨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다. 고종에게는 일찍이 9남 4녀의 자식이 있었지만 대부분 어렸을 때 죽고 살아남은 자식은 덕혜옹주를 포함하여 3남 1녀뿐이었다. 당시 고종황제의 나이가 62세였으니 덕혜옹주의 탄생은 고종에게는 크나큰 기쁨이었다. 조선시대 역사상 옹주를 기억하는 분은 영조 때 사도세자의 여동생인 화완옹주와 덕헤옹주가 그나마 세인의 관심을 받았을 뿐이다. 고종의 덕혜옹주에 대한 사랑은 대단하였다. 덕혜옹주는 고종에게 일종의 엔도르핀 같은 역할을 하였다. 1910년, 고종은 총애하던 아들 영친왕 이은을 황태자에 책봉했다. 하지만 통감 이토 히로부미에 의해 영친왕은 유학이라는 명목으로 일본에 끌려갔다. 영친왕에 이어 그녀까지 일본에 빼앗길까 두려웠던 고종은 은밀히 그녀의 약혼을 추진했다. 그리하여 시종 김황진의 조카 김장한을 부마로 내정했지만 그 사실을 알게 된 일본이 김황진을 궁궐에서 내쫓는 바람에 덕혜옹주의 약혼 작전은 실패하고 말았다. 1919년 1월 21일, 고종이 68세의 나이로 의문에 죽음을 당했다.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했던 덕혜옹주는 깊은 슬픔에 빠졌다. 더불어 자신도 언젠가 아버지처럼 죽임을 당할지 모른다는 공포감을 갖게 되었다. 1925년 3월 24일, 순종은 덕혜옹주에게 도쿄 유학을 명령했다. 그것은 일본의 뜻이자 조선을 관장하고 있던 사이토 총독의 뜻이었다. 갑작스럽게 일본행을 통보받은 덕혜옹주는 앞길이 막막했다. 사랑하는 아버지를 잃은 것도 모자라 이젠 어머니와 생이별하게 되었으니 그 설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일본 생활 5년째인 1929년 5월 29일 어머니 귀인 양씨가 유방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비보를 듣고 급히 귀국한 덕혜옹주는 검은 상복 차림으로 장례식에 참석했다. 하지만 일제는 그녀를 장례 이틀 후 일본으로 돌려보냈다. 그 일로 옹주는 커다란 정신적 충격을 받았다. 허탈한 심정으로 일본에 돌아온 덕혜옹주는 영친왕의 저택에 머물며 우울한 나날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그녀는 기이한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영친왕 부부가 이상하게 여기고 병원에 데려가 진찰해 보니 정신분열증이었다. 그 무렵 일본 왕실에서는 덕혜옹주의 남편으로 쓰시마의 36대 도주 24세의 백작 소 다케유키(宗武志)를 내정했다. 사실 소 다케유키도 정략결혼의 희생자였다. 정신이 온전치 못한 사람을 아내로 맞이해야 하는 그 역시 심사가 편할 리 없었다. 그러나 덕혜옹주의 증세가 심해지면서 갈등이 깊어졌다. 소 다케유키는 간병에 지쳐버렸는지 1946년 그녀를 마쓰자와 정신병원에 입원시켰다. 10년 뒤인 1955년에는 영친왕 부부와 협의한 끝에 이혼했다. 그녀의 유일한 딸이었던(당시 24세) 마사에가 부모의 이혼의 충격으로 자살하겠다는 유서를 남기고 가출했다는 것이었다. 경찰이 수색작업에 나섰지만 그녀는 영영 발견되지 않았다. 소 다케유키는 덕혜옹주와 이혼한 그 해에 가츠무라 요시에라는 일본 여성과 재혼하여 2남 1녀를 얻었다.
1950년 서울신문 도쿄 특파원으로 부임한 김을한(과거 덕혜 용주의 부마로 내정되었던 김장한의 친형) 기자는 소 다케유키에게 전화를 걸어 덕혜옹주의 근황을 물었지만 마쓰자와 정신병원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김을한 기자는 그때부터 정부 요인들을 찾아가 덕혜옹주를 조국으로 돌아오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하지만 영친왕의 귀국조차 용인하지 않던 속 좁은 이승만 정부가 덕혜옹주의 신변에 신경 쓸 리 만무했다. 그렇게 덧없는 세월이 흘러갔다. 한국에서는 1960년 4.19 혁명으로 이승만과 자유당 정권이 종말을 고했고, 1961년에는 5.16 군사정변으로 박정희 소장이 정권을 잡았다. 그해 11월 12일 미국 방문길에 오른 국가재건 최고회의 의장 박정희가 도쿄에 들렀다. 그때 김을한 기자는 박정희를 찾아가 덕혜옹주의 귀국을 간청했다. 그러자 망국의 왕족을 돕는 것이 정치적으로 유익하다고 여긴 박정희는 전폭적인 협조를 약속했다. 1962년 1월 26일, 51세의 덕혜옹주는 38년 동안의 원치 않던 일본 생활을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왔다. 그녀를 실은 비행기가 김포공항에 착륙하자 소학교 동창 민용아와 당시 72세였던 유모 변복동이 눈물을 흘리며 맞이했다. 변씨는 그녀의 모습을 보자마자 땅바닥에 엎드려 큰 절을 올리기까지 했다. 그녀는 이후 1972년 8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정성을 다하여 옹주를 돌봐주었다.
덕혜옹주는 1968년 가을 창덕궁 낙선재 안에 있는 수강재로 거처를 옮겼다. 그 무렵 전 남편 소 다케유키가 낙선재로 찾아왔지만 그를 미워하던 종실 관계자들이 매몰차게 쫓아냈다. 어렵사리 옛 아내를 만나러 왔던 소 다케유키는 허탈한 표정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는 1985년 77세의 나이에 쓰시마에서 세상을 떠났다. 소 다케유키는 일본 왕실의 일원으로서 일왕의 명령에 따라 결혼했지만, 아내의 심화된 정신병 때문에 정상적인 결혼생활을 유지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가 생전에 쓴 시에는 덕혜옹주를 ‘사랑하는 아내’로 묘사하고 있다. 덕혜옹주도 1989년 4월 21일 창덕궁 수강재에서 7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곳에는 옹주가 맑은 정신일 때 썼다는 한 장의 낙서가 남아있다.
“나는 낙선재에서 오래오래 살고 싶어요. 전하, 비 전하. 보고 싶습니다. 대한민국 우리나라...”
이 영화는 “8월의 크리스마스”로 유명한 허진호 감독의 작품으로 철저하게 잊혔던 비운의 여인을 세상 밖으로 끌고 나왔다. 특히 영화가 종반부에 다다를수록 억지가 아닌 자연스럽게 관객을 울리는 테크닉이 뛰어났다. 특히 덕혜옹주 역을 맡은 손예진은 그전에 그녀가 보여 주었던( 작업의 정석) 깜찍, 발랄한 연기보다는 한 인간의 말할 수 없는 내면의 고통을 리얼하게 연기로 승화시키는 마치 소름이 돋은 열연을 보여주었다. 김장한 역으로 열연한 박해일은 당시의 지성인들이 가지고 있는 내면의 모습을 잘 표현하였다. 특히 극 후반부에 주인공들의 나이 든 모습을 아주 세심하게 분장하여 마치 세월이 덧없이 흐른 모습을 잘 표현하였다. 우리는 역사에서 귀중한 교훈을 얻곤 하는데 나라가 힘이 없고 지도자가 올바르지 못한다면 그 고통은 온전히 국민에게 전가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지금 작금의 우리나라는 사드 배치 문제로 나라가 온통 시끄럽다. 나는 사드 배치가 올 바른가 그른가에 대한 답보다는 위정자들의 행태를 지적하고 싶다. 계륵과도 같은 사드 배치 문제에 대해 충분한 대화와 토론 없이 기습적이고도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는 집권당과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는 야당의 행태도 마치 구한말 풍전등화의 위기에서 개인과 조직의 사리사욕을 위해 나라를 팔아먹는 을사오적들과 다를 바가 뭐란 말인가? 우리는 위정자들이나 힘이 있는 사회 지도층들의 말 한마디와 행동에 대해 기록하고 거기에 대해서 반드시 책임을 물어야 한다. 미당 서정주는 일본이 망하리라 상상도 못 하였기에 친일을 했다는 망발을 늘어놓았다. 프랑스는 약 3년간 나치의 꼭두각시 정권이었던 비시 정권에서 친 나치 행동을 했던 지식인 정치인 등 3만여 명을 처단하였다. 우리의 역사에는 이러한 것이 없기에 친일을 하면 3대가 부유하고,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는 말이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누가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걸고 헌신하겠는가? 지금부터라도 민족정기를 바로잡고 진정한 애국의 길을 모색할 때 덕혜옹주와 같은 비운의 인물이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이 영화는 덕혜옹주라는 인물을 통하여 우리에게 너무도 많은 생각과 고민을 안겨준 근래에 보기 드문 수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