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 Marx의 자본1을 읽고

 1  K Marx의 자본1을 읽고-1
 2  K Marx의 자본1을 읽고-2
※ 미리보기 이미지는 최대 20페이지까지만 지원합니다.
  • 분야
  • 등록일
  • 페이지/형식
  • 구매가격
  • 적립금
자료 다운로드  네이버 로그인
소개글
K Marx의 자본1을 읽고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K. Marx의 을 읽고
피터 버거는 라는 책에서 유대인식당에서 일하는 중국인 일화를 들려준다. 유대인 식당에서 유창하게 리투아니아어(?)를 구사하는 중국인 노동자를 보고 한 손님이 감탄하는데, 식당 주인은 다급하게 “쉿! 저 사람은 지금 자기가 영어를 배우고 있는 줄 안다고요!”라고 말한다.
맑스는 이라는 제목에 매우 충실하게도, ‘자본주의’라는 당시 갓 태어난 경제체제를 여러 각도에서 해체하고 분석하고 있는데, 책을 읽으면서 내가 학교에서 배웠던 경제학, 경영학 수업이 불쌍한 저 중국인이 겪고 있는 상황과 비슷하지는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수요-공급 그래프를 그리고 소비자의 효용을 수치화하여 계산하고, 파생금융상품의 가격은 어떻게 결정되는지, 원가는 정해진 회계규칙에 따라 어떻게 계산되는지, 효율적인 생산운영관리는 어떤 방법이 있는지 등등.
사실 이 모든 것은 ‘자본주의’라는 경제시스템을 보편적이라고 가정한다. ‘자원의 희소성 때문에 모두가 똑같이 자원을 분배받을 수는 없다. 하지만 각자의 이기적인 선택이 결국은 사회 전체의 관점에서는 최선이 된다.‘는 자유주의 경제학의 기본 전제가 모든 경제 시스템의 본질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자본주의의 태동기에 이는 결코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제24장 “이른바 본원적 축적(primitive accumulation)>”이라는 장을 읽으면서 “자본은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모든 털구멍에서 피와 오물을 흘리면서 태어난다.”(p1019)는 맑스의 문장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중세에서 자본주의 사회로의 이행은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고통을 야기했다. 농민에게서의 생산수단 수탈, 노예무역과 식민지 개척은 본원적 축적의 주요 수단이었다. 이런 방식을 동원해 화폐는 자본이 되고 잉여가치를 만들고 산업자본주의가 시작될 수 있는 자본의 기틀을 닦게 되었다.
야만적인 본원적 축적과정이 끝나면 자본주의 체제는 잉여가치(이윤)의 절대량을 늘리기 위해 시도한다. 맑스의 표현에 따르면 “자신의 구매한 상품(노동)의 사용가치에서 최대의 효용을 얻어내려고 하는”(p332)것이다. 이 과정에서 인간의 노동은 자본주의 생산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한다. 사실 노동이 그 자체로 신성한 것으로 여겨졌던 시대는 없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에서 중세의 귀족과 근대 이자생활자에 이르기까지 노동하지 않는 유한계급은 항상 더 ‘고상한’ 계급에 속하는 지배자들이었다. 노동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언제나 구분되었다. 하지만 자본주의의 또 다른 문제는 노동 그 자체가 아니라 이 노동을 이용하는 방식에 있다.
앨리 러셀 혹실드의 은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델타항공 승무원들을 참여관찰하여 관리된 감정이 어떻게 상품화되고 있는지를 분석했다. 그녀의 분석에 따르면 노동자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감정관리’ 그 자체가 아니다. 감정관리는 한편으로 세련된 방식으로 사람들과 상호작용 할 수 있는 수단이다. 하지만 그것이 자본의 논리에 의해 규제되면서 인격이 무시되고 하나의 상품으로 이용되면서 인간의 소외가 나타난다. 단순한 상품처럼 감정이 인위적으로 관리해야 할 대상이 되면서 감정노동을 수행하는 노동자가 비인격화되는 것이다.
중세에서 자본주의 사회로의 이행이 수많은 고통을 야기하면서 매우 천천히 진행되었다. 이는 역설적으로 자본주의사회에서 다른 사회로의 이행 역시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음을 뜻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맑스’ 하면 쉽게 혁명이나 프롤레타리아트의 단결을 떠올리지만 그는 의 서문에서 “한 사회가 설사 자신의 운동에 대한 자연법칙을 발견했다 하더라도 그 사회는 자연적인 발전단계들을 생략하고 건너뛸 수는 없으며 또한 그것을 법령으로 제거할 수도 없다. 단지 그 사회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자신의 산고를 단축하고 완화하는 것뿐이다.”(p47)라고 밝히고 있다.
자본주의의 생산성은 과거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많은 발전을 거듭했지만 여전히 모순을 빚어내고 있으며 특히 한국사회에서 이에 대한 제도적 안전망은 부재하다는 생각이 든다. 맑스가 150년 전에 유럽사회 자본주의의 모순을 파헤치고 신랄하게 보여주었듯이 내가 살아가고 있는 지금 한국사회의 자본주의와 노동자들이 처해있는 현실에 대해 주의 깊은 분석과 성찰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