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스칼팡세 독서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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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파스칼의 를 읽고 ---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고 파스칼은 말했다. 많은 비유 중에서 왜 갈대라고 명명했을까. 우리나라에서 통용되는 갈대에 대한 통념(연약함, 흔들리는)이 프랑스에서도 통용되었을까. 한편 생각한다는 것은 참 매력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생각하되 올바로 사유하는 것, 이것이 파스칼이 권하고 있는 요지이다. 파스칼은 분명 인간은 생각하기 위해 만들어졌고 이것이 인간의 모든 존엄성이고 모든 가치이며 사유는 인간의 위대를 이룬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사유란 무엇인가. 결함을 가지고 있는 인간의 사유가 얼마나 어리석은지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다. 파스칼은 회의주의와 얀센주의의 중심부에 서 있었던 사람이다. 의 곳곳에서 회의주의자들에 대한 그의 견해가 나오는데 그 또한 회의주의자이면서 얼핏 보면 회의주의자들을 비판하고 있는 듯해 보인다. 그는 회의주의자이면서 완전한 회의주의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고 인간의 이성, 논리적 설명에 대한 답은 인간의 이성으로는 불가능하므로 상상력의 세계, 신의 영역, 신앙으로 모든 의심을 극복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것에 대한 해답은 회의주의에 대한 탐구를 통해 가능하리라고 본다. 특히 그가 살았던 17세기 회의주의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회의주의 [skepticism, 懷疑主義]철학 | 브리태니커
여러 영역에서 주장하는 지식에 대해 의심을 품는 철학적 태도.
회의주의자들은 어떤 주장이 어떤 기초에 입각해 있으며 실제로 무엇을 확립하는지 물음으로써 그 주장의 적합성 또는 신뢰성에 도전해왔다. 고대부터 회의주의자들은 독단적인 철학자·과학자·신학자의 주장을 비판하는 논증을 전개해 왔다. 온갖 독단주의에 반대하는 회의주의자들의 논증은 서양철학사에 등장하는 여러 철학 문제와 그 해결책이 형성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회의주의는 지식을 형성하는 온갖 분야에 걸쳐 전개되었다. 예를 들어 형이상학이나 과학 분야에서는 확실한 지식의 획득 여부가 문제시되었다. 의학에서는 질병의 원인과 치료법에 관한 확실한 지식의 획득이, 윤리학에서는 규범·관습의 수용과 가치 판단의 객관적 기준이, 종교에서는 전통을 달리 하는 교리들이 회의주의의 의심을 받았다. 또 흄이나 칸트와 같은 철학자들은 경험 세계의 배후, 즉 현상의 원인에 대해서는 어떠한 지식도 얻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회의주의의 대표적 형태는 지식 일반에 관한 것으로 인식론적 회의주의라고 불리며 어떤 것이 과연 완전하고 충분한 확실성을 갖고 우리에게 알려지는가를 문제삼는다. 인식론적 회의주의는 의심이 일어나는 영역, 즉 의심이 이성을 향하느냐, 감각을 향하느냐, 사물 자체의 인식을 향하느냐에 따라 그 종류가 구분될 수 있고, 의심하는 사람의 동기, 이를테면 이데올로기적 이유인가, 실용적이거나 실천적인 이유인가에 따라서도 구분될 수 있다. 또 회의주의는 얼마나 엄격하고 철저한가에 따라, 즉 특정 영역 및 지식을 대상으로 하느냐 아니면 더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것이냐에 따라 그 종류가 구분될 수도 있다.
17세기 회의주의
회의주의에 대한 새로운 관심은 미셸 드 몽테뉴와 그의 사촌 프란시스코 산체스 몽테뉴에 의해 철학적으로 일반화된 모습을 띠고 나타났는데, 두 사람은 모든 영역에서 인간이 주장하는 지식은 극히 의심스럽다고 주장했다. 미셸 드 몽테뉴는 자연과 관습에 따라 살면서 신이 계시하는 것은 무엇이든 다 받아들일 것을 권했고, 프란시스코 산체스 몽테뉴는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점을 인정하는 선에서 극히 제한된 경험과학적 정보를 획득하는 데 노력할 것을 옹호했다. 미셸 드 몽테뉴의 회의주의는 17세기초에 깊은 영향력을 행사했다. 피에르 샤롱, J.P. 카뮈, 라 모트 르 바이예 등이 미셸 드 몽테뉴의 견해를 널리 퍼뜨렸으며, 많은 반종교개혁가들이 칼뱅주의를 공격하기 위해 미셸 드 몽테뉴와 섹스토스 엠피리코스의 주장을 이용했다. 미셸 드 몽테뉴의 회의주의는 새로운 과학을 포함한 온갖 종류의 학문 분야를 반대하고 경건주의와 결합했다.
1620년대에는 이러한 새로운 회의주의를 반박하거나 완화하려는 노력이 나타났다. 원래 회의주의자였던 에피쿠로스주의자 피에르 가생디와 당시 지적 혁명에 매우 큰 영향을 끼친 마랭 메르센은 실재에 관한 지식을 인식론적으로 의심하면서도 과학이 세계에 관한 쓸모 있고 중요한 정보를 제공한다고 인정했다. 가생디와 메르센의 건설적 회의주의는 산체스 몽테뉴의 태도를 새로운 과학에 대한 가설적·경험적 해석으로 발전시켰다. 르네 데카르트는 새로운 회의주의를 근본적으로 반박했다. 데카르트는 거짓일지도 모르는 모든 믿음을 의심하는 회의적 방법을 사용함으로써 우리는 정말로 의심할 수 없는 하나의 진리, 곧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를 발견할 수 있으며 또 이러한 진리로부터 참된 지식의 기준을 찾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색인 : 코기토 에르고 숨). 나아가 우리는 이러한 기준을 사용함으로써 신 존재, 즉 신이 우리를 기만하지 않고 우리의 명석·판명한 관념을 보증하는 존재임을 확신할 수 있으며, 외부 세계의 존재와 아울러 수학적 자연학을 통해 세계를 알 수 있다고 했다. 데카르트는 회의주의에서 출발하여 실재의 지식에 대한 새로운 토대를 찾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17세기 전체를 통해 메르센, 가생디, 시몽 푸세, 피에르 다니엘 위예 등 회의주의적 비판가들은 데카르트의 회의적 방법을 철저히 밀고 나가면 그의 새로운 체계가 완전한 회의주의에 이를 수밖에 없음을 보여줌으로써 그의 시도가 성공적이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로크를 비롯한 영국의 철학자들은 인간이 합리적 존재이기 때문에 모든 것을 의심하기란 블가능하다는 상식에 호소하여 회의주의를 약화하려 애썼다. 직접적인 경험을 넘어선 지식을 지지하는 충분한 증거가 없다고 해서 모든 것이 의심스러운 것은 아니며, 상식이라는 기준을 사용할 경우 우리의 많은 믿음은 적절한 기초를 가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팡세 Pensees〉에서 회의주의를 아주 강하게 드러낸 블레즈 파스칼도 완전한 회의주의란 있을 수 없다고 했다. 파스칼에 따르면 완전한 회의주의에 대해 결코 이성적인 대답을 할 수 없는 인간은 신의 도움만을 받아 의심을 극복해야 한다. 17세기 회의주의는 피에르 벨의 저술, 특히 〈역사적·비판적 사전 Dictionnaire historique et critique〉(1697~1702)에서 최고조에 이르렀다. 탁월한 변증론가인 벨은 고대·근대의 철학·과학·신학 이론들이 혼란·역설·모순 등에 귀착한다면서 그 이론들에 도전했다. 또 회의주의에 입각해 분석할 경우 데카르트·라이프니츠·스피노자·말브랑슈 등의 이론은 세계에 관한 모든 정보, 심지어 세계의 존재까지도 의문시한다고 주장했다. 벨은 모든 영역에서 인간의 지적 활동의 신뢰성을 약화하기 위해 감각적 정보, 인간의 판단, 논리적 설명 등에 대한 회의주의의 주장을 능숙하게 이용했다. 벨은 인간이 이성적 활동을 포기하고 신앙과 계시에 맹목적으로 의지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래야만 인간은 참된 신앙을 결정하는 아무런 기준 없이 자신의 양심만 따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1655년 포르루아얄 데 샹에 체류하면서 철학과 종교에 관한 대화를 드사시와 주고 받는다. 1656년부터 장세니스트(얀센주의자)들에 대한 예수회의 비난이 격화되자 (일명 )이라는 글을 통해 장세니스트들을 변론하는데 앞장선다. 1658년부터는 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 대항하기 위해 ‘기독교 포교론’을 쓸 구상을 시작했는데 1659년부터 건강이 현저하게 악화되어 1662년 39세의 일기로 세상을 마친다. 1670년에는 파스칼의 유고 출판이 성사되어 가 세상의 빛을 보게 된다. 우리가 를 읽는 목적은 무엇일까. 나는 를 읽으면서 그 당시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인들의 세계관인 기독교를 더 잘 알 수 있었다. 그 보다 더 관심이 갔던 것은 파스칼의 참모습, 파스칼의 진정한 의도였다. 철학자이자 수학자였던 파스칼이 실용적 학문의 범주를 뛰어 넘어 기독교 원리 탐구와 인간과 신에 대한 사색에 전념하게 된 배경이 궁금했다. 그래서 이 책의 “제 11편 포르루아얄에서”를 살펴 보고자 한다. 포르루아얄은 “얀센주의”라는 세계교회 100대 사건의 하나가 일어났던 중심 장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