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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커맨딩 하이츠
내용 요약
경제 이념 전쟁
커맨딩 하이츠는 1922년 레닌이 소련 공산당 전당대회에서 처음 사용한 개념 한 국가의 경제를 주도하는 기간 산업 또는 주도세력을 의미한다. 이 커맨딩 하이츠를 정부가 주도해야 하는지 시장이 주도해야하는 지에 대한 이념 전쟁이 있었다. 이 싸움의 주인공은 케인즈와 하이에크, 1936년 케인즈의 고용, 이자, 화폐에 대한 이론 제시로 승부가 났고 70년대 오일쇼크가 일어나기 전까지 이 이론이 득세하게 되었다. 이 시기 케인즈가 주장한 것은 정부가 시장을 통제하고 재정의 역할을 확대함으로써 수요를 늘리고 완전 고용을 달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70년대 오일쇼크로 인하여 스테그플레이션이 발생하게 되었고 케인즈의 이론으로 설명할 수 없는 문제점이 발생하게 되었다. 이때 떠오르게 된 이론이 하이에크의 이론이다. 젊은 날은 케인즈의 이론에 눌려 빛을 못 발했지만 이 시기를 계기로 그의 이론이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하이에크의 이론은 정부의 역할을 최소화하고 모든 것을 자유 시장에 맡겨야 한다는 것이다.
100년간의 경제전쟁의 핵심은 시장 기반이 옳은지 국가 개혁경제가 옳은지에 관한 것이다. 케인즈의 사상은 수십 년간 서구 세계의 경제를 지배하였고 시장은 경제를 통제하기 어렵다고 보았다. 이와 반대로 하이에크는 시장은 경제 조절능력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세계 1차 대전이 끝나고 전쟁 보상금 문제로 점령국 국가들이 독일에 모여 막대한 보상금을 독일에 요구할 때 케인즈는 독일을 이렇게 굶긴다면 언젠가는 복수가 시작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보상금으로 인하여 독일은 하이퍼인플레이션을 겪게 되었고 이 때문에 나치와 히틀러가 집권할 수 있게 되었다. 1920년대 미국은 호황을 누리고 있었고 주식은 천정부지로 오르고 있었다. 그러다 검은 목요일을 겪고 자산 가치는 급격하게 하락하기 시작하였다. 이런 결과 실패한 자본주의 대신 파시즘이 옹호를 받기 시작했다. 이런 대공황이 생기면서 케인즈는 전체주의가 민주주의를 삼켜버릴 수 있다고 생각하여 거시경제학에 대한 일반 개념을 고안하였다. 대공황 시대에 당선된 루즈벨트는 케인즈 사상에 기반한 뉴딜정책을 통해 자본주의 규제방안들을 만들기 시작했다. 케인즈는 고용, 이자 및 화폐의 일반이론을 출간하여 정부지출을 확대해 완전 고용을 이루고 유지한다고 주장하였다. 미국은 이 이론을 바탕으로 부채를 두려워하지 않고 재정지출을 확대하였다. 그러나 하이에크는 예종에의 길 출간을 통해 케인즈가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자유란 절대적 가치이며 대공황 속에서도 정부의 개입을 반대하였다. 그러나 이념 전쟁에서는 하이에크가 밀리고 있었으며 득세한 케인즈는 브렌트 우즈 방문으로 세계은행과 IMF가 창설하기에 이르렀다. 영국에서는 세계대전이 끝나고 영국은 당연히 처칠이 당선이 될 것으로 예상했으나 결과는 노동당의 승리로 당시 영국을 대규모의 국유기업과 소규모의 사기업들이 공존하는 혼합경제체제로 만들었다. 그리고 이 당시 러시아에서는 사회주의가 퍼지고 있었으며 냉전의 시작을 알리고 있었다.
미국의 시카고학파는 경제를 제대로 통제하려면 정부의 역할을 최소화하고 자유 시장을 확대해야 한다는 믿음을 강하게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 당시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은 케인즈 주의를 표방하는 연설을 하였고 30년간 큰 호황을 누렸다. 그러나 호황 후 스테그플레이션의 발발은 케인즈 사상의 종말을 예고했다. 닉슨 대통령은 당시 스테크플레이션을 정부 규제를 통해 풀려고 했고 영국 역시 가격 통제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 하였다. 그러나 결과는 실패했고 마가렛 대처와 레이건의 등장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이로인해 신자유주의 물결은 빠른 속도로 퍼지기 시작했다. 그동안 항공업계를 규제하던 미국은 철저한 가격 경쟁을 도입하였고 영국 역시 민영화라는 개념을 만들어내며 시장의 자유를 급격히 늘려나가기 시작했다.
개혁의 고통
소련은 레닌의 혁명으로 성장발전 모델이 되었으나 정치범들을 이용한 강제 노동, 석유수익 등 경제 발전의 비밀은 철의 장막 안에 철저히 숨겨왔다. 인도 역시 민간 분야를 포함 모든 것을 정부 통제에 두었다. 라틴 아메리카 역시 국내 산업을 보호하여 조금의 일자리 창출을 하였으나 산업은 도태되어갔다. 이 사회주의의 실패는 낮은 생산성에 있었다. 노동자들에게 어떠한 동기도 없었기 때문에 그들이 일을 열심히 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와중에 칠레의 군부정권이 들어서게 되었고 정치와 군 통제에 막대한 관심으로 인한 경제 소홀로 경제적 위기에 빠지게 되었다. 여기에 구원자로 나타난 것이 시카고 보이즈로 미국의 시카고학파의 사상을 배워 돌아온 칠레의 경제학자 그룹들을 지칭하였다. 이들은 자유 시장체제를 선택하여 급격한 시장개혁을 하여 수출을 증가시키고 경제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30%에 육박하는 실업률과 커져가는 빈부격차가 있었다. 소련 역시 고르바초프의 등장으로 개인 기업을 허용하면서 천천히 개혁을 시작하였고 폴란드 역시 노동조합이 탄생하며 파업의 권리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
남로를 중심으로 발전된 경제이론인 종속이론은 선진국에 종속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교역을 중단하고 국내산업 자립을 통해 경제 개발을 달성한다는 이론이다. 그러나 이 이론을 신봉했던 남미 대부분의 국가들은 빈곤을 경험했고 하루 바삐 개혁을 서둘러야만 했다. 볼리비아는 인플레만 6만%에 달할 정도로 극심한 문제에 시달렸는데 산체스 데 로자다 대통령의 극단적 경제 개혁 조치인 충격 요법을 통해 종속이론을 폐지하고 선진국과 교역을 시작하게 되었다. 중남미 여러 나라가 볼리비아를 따라하게 되었고 이는 동유럽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그러나 러시아는 이러한 급진적인 충격요법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너무나 큰 경제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국을 주시하게 되었는데 중국은 중국 특유의 사회주의를 만들어 내부분열을 막고 시장개방에도 성공할 수 있었다. 중국의 성공과는 다르게 소련은 해체의 수순을 밟고 옐친 대통령의 가격 통제 폐지와 중앙통제 경제 폐지를 선언한다. 그러나 하이퍼인플레이션 문제를 만들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러시아는 디폴트를 선언하게 되고 옐친은 퇴임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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