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을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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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서평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을 읽고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을 읽고 -
이 책을 읽기 전, 나는 죽음에 취해 있었다. 분명 심장은 역동적으로 뛰고 있었지만, 살아있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현실의 구조가 잘못되었을 뿐이라는 문제의식 그리고 ‘나는 제대로 살고 있지 않다.’라는 생각만 하고 있을 뿐, 나는 확실히 살아있는 존재라고 느꼈다. 평소 나는 친구들을 만나 사는 이야기들을 업데이트하고, 이성과 애정을 나눌 때도, 부모님의 사랑을 받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을 느꼈다. 가고자 했던 대학에 입학하게 되었고, 좋은 성적도 받아 주변인으로부터 인정받았다. 그러나 나는 Self로서의 ‘나’가 아닌, ‘누군가’의 삶을 살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이 행복인지 몰랐다. 친구들을 만나 술을 마시며 나에 대해 물음을 구하곤 했지만 나에 대한 평가에 대해 “나도 나를 잘 모르는데, 너희 자식들이 감히 나를 얼마나 안다고 평가하느냐?”며 역성을 내곤 했다.
내 주변에는 거의 모두 행복감을 좇는 존재들, 그래서 좀비가 되어버린 사람들만이 존재했었다. 그들은 앞모습만을 보았고 보이지 않는 것을 보지 못했다. 아니, 보고 싶은 마음조차 없었고 문제의식조차 가지지 않았다. 나는 뒷모습을 봐야한다는 사실은 몰랐지만 적어도 앞모습이 전부가 아니라는 생각 정도는 가지고 있었다. 나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 삶의 경험과 지혜가 많아 보이는 사람들에게 나의 고민을 털어놓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모두 같았다. “진정한 저는 누구인가요?”라는 물음에 대한 답은 경험적 자아(Ego)였다. 그들은 모두 나의 정체성을 경험의 집합으로 규정지었다. 심지어 누군가는 “넌 너무 인생을 복잡하게 살아. 도대체 네가 누구인지가 뭐가 중요하단거야? 과제는 다했니? 군대는 갔고? 취직은? 좀 둔감해질 필요가 있어. 넌 너무 예민하다고, 우린 그저 주어진 일을 하며 살기에도 바쁘다고!”라고 말했다. 주변의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내 영은 죽어만 갔다. 십계명의 말대로 그들은 내게 ‘거짓 증언’을 하고 있었다. 나는 이상의 ‘날개’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그들에게서 묘한 이질감을 느꼈다. 그리고 반복되고 의미 없는 삶을 이어나가느니 생을 마감하고 싶다는 생각마저도 들었다. 행복감에 늘 굶주린 삶, 평생 바위를 굴리는 시지프스의 삶, 뫼비우스의 띠처럼 처음과 끝이 구분되지 않는 내 삶이 늘 비참하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부모님이 슬퍼하실 생각을 하니, 아니 그보다도 ‘내가 태어났으니 나로 살고 싶다! 해답은 분명 있을 것이다!’라는 생각에 생을 끊지 못했다. 그렇지만 꽤 오랜 시간 행복을 찾았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행복감을 행복으로 알고 추구해왔고, 나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닌 ‘내가 살아지는 것’으로서의 삶을 살게 되었다. 그래서 내가 내린 결론은 ‘인생은 원래 그렇다. 나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나와 같이 살다가 생을 마감한다.’였다.
그러나 이 책을 읽고 난 후, 나는 내가 틀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느꼈던 공허함은 행복이 아닌 행복감을 무한히 욕망했던 결과였다. ‘나’는 나로 살지 못하고 몸의 욕망에 중독되어있었다. 내가 찾았던 행복은 ‘권력에의 의지’ 그 자체였다. 물론, 행복감이 무조건적으로 나쁜 것은 아니다. 하지만 행복을 통해 진정한 행복감을 느끼는 자만이 행복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고, 행복감에 따라 요동치지 않는 삶을 살 수 있다. 실제로, 우리는 가장 살아있다고 느낄 때 실로 우리는 가장 죽어있다. 그렇다. 나는 죽어있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나의 영은 죽어있었다. 그 동안 나는 몸적 자아를 진정한 나(Self)로 착각했고, 혹은 그것이 너무 좋아 몸의 욕망을 추구해왔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죽음을 취하기로 결심하였다.몸이나 지정의로서의 마음이 아닌 영에 의해 지배되고 영에 의해 결정되는 삶을 살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나는 또다시 난관에 봉착했다. 그렇다면 영의 행복은 무엇인가? 행복감이 아닌 행복은 무엇인가?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고민에 빠져있던 중 나는 행복감을 경험한 나, 즉 Ego로서의 나를 지워나가기 시작했다. 친구가 웃어 행복한 나, 애인이 웃어 행복한 나, 부모님이 웃어 행복한 나를 지우고 나니, 아무 것도 남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러던 와중 어머니로부터 받았던 사랑에 대한 감사가 느껴졌다. 어머니로부터 사랑받는다는 느낌을 받았을 때는 내가 대학에 입학해 부모님께 칭찬을 들었을 때도, 내가 좋은 성적을 받아 기뻐하시는 모습을 볼 때도 아니었다. 나는 내가 어머니의 자궁에 있을 때, 어머니가 내게 온전히 용해되어 들어왔을 때의 사랑을 느꼈다. 너무나 포근하고 안락한 느낌, 기억은 나지 않지만 나는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주는 사랑이 느껴졌다. 어머니의 사랑은 아름다웠다. 그래서 나는 영화 ‘인터스텔라’가 던지는 메시지처럼 ‘사랑이 곧 진리이며 행복’임을 깨달았다. 그렇지만 어머니의 사랑은 완전하지 않았다. 모성애는 본능이다. 어머니는 나를 사랑한다. 하지만 더 구체적으로 표현한다면 사랑할 수밖에 없다. 어머니의 사랑은 경험적 자아로서의 나(Ego)가 경험한 최고의 사랑이었지만 본능인 그것은 조건적이고 제한적인 사랑이었다.
다음으로 느낀 것은 자연으로부터의 사랑이었다. 공기, 물, 대지 등 모든 것들이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 심지어 어머니인 자연(대지모)을 파괴할 때도 자연은 인간을 사랑한다. 경험할 수는 없었지만 ‘그 사랑’의 모습이 느껴졌다. 그러나 자연의 사랑도 역시 한계가 있었다. ‘자연(自然)’은 그 단어 그대로, ‘스스로 그러하다.’ 즉, ‘저절로 사랑하도록’ 만들어졌다. 물론 자연의 사랑은 위대하지만 어떠한 강력한 힘에 의해 사랑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진 존재였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자연은 자정능력이 있다. 자연은 스스로의 존재를 유지하기 위해 체제(System)가 있고 해일, 지진, 화산분출 등으로 인간에게 시련을 준다. 물론 이러한 자연의 시스템이 악하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자연에게 선악이라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다. 자연은 그저 ‘그렇게 하는 것’이지만 사람들은 선악을 판단하고 가치평가를 내린다. 때문에 사람들은 자연재해로 사상자가 속출할 때면, “신도 무심하시지! 아니, 신은 없어! 신이 있다면 어떻게 이러한 반인륜적인 일을 저지를 수 있어?”라고 말한다. 심지어는 영화 ‘셔터 아일랜드’의 한 보안관은 폭풍 이후 주인공인 디카프리오에게 “신은 폭력을 좋아하지요. 사람들은 신은 선물은 사랑이라고 말하지만, 지금 이 꼴을 봐요! 신의 선물은 폭력입니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들은 논리적 오류를 범하고 있다. 멀쩡한 신과 자연이 무슨 잘못이 있는가? 신은 자연이 아니며, 나아가 자연은 그저 해야 할 일을 하는 것뿐이다.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은 항상 인간이다.
자연과 어머니의 사랑의 한계를 느낀 나는 내 애인으로부터 오는 사랑을 완전한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그녀의 사랑은 모성애처럼 본능도, 자연처럼 ‘스스로 그러한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고 있었다. 아니, 사실 ‘그 사랑’을 닮은 사랑을 하고 있었다. 레비나스의 타자성이론에 따르면, 인간은 누구나 마음대로 할 수 있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신비 즉, 타자성을 가지고 있다. 나와 다른 존재라는 단순한 차이가 아닌, 내가 함부로 규정하거나 판단할 수 없는 그 자신만의 존재인 타자성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 그녀는 나를 절대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은 그녀의 잘못이 아니다. 인간이라면 절대 타인을 이해할 수 없다. 진정한 이해(Under+Stand)인 ‘내가 아래에서 남을 바라봄’이 아니라 타인을 아래에 놓고 주관적으로 바라보기 때문이다. 오직 실체[Sub(Under)+stantia(Stand)]인 신만이 진정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이해할 수 없음을 인정했고, 역설적이게도 그로써 우리는 진정한 이해로 출발했다. 나는 진정으로 그녀와 ‘만남’을 이루어냈다. 그녀는 내가 진리(빛)를 찾는 것을 받아들였고, 내 과거를 받아들였으며 내 미래의 변화가능성도 인정하였다. 그리고 나는 그녀의 사랑으로부터 떠나 진리로서의 사랑을 찾으러 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