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뻐꾸기 둥지위로 날아간 새 감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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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뻐꾸기 둥지위로 날아간 새‘ 감상문
‘뻐꾸기 둥지위로 날아간 새’는 Ken Kesey 의 소설을 영화로 제작한 작품이다. 해당 작품은 1975년에 영화로 상영되었는데 많은 관객들의 호응을 받았을 뿐 아니라, 당시 미국 사회에 적잖은 영향을 끼친 작품이라고 한다. ‘뻐꾸기(cuckoo)’는 미국에서 ‘정신병자’를 뜻하는 속어로, 즉 제목의 ‘뻐꾸기 둥지’는 바로 정신병원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시 미국의 정신병원은 내가 생각했던 것과 너무나도 달랐다. 자유, 민주주의의 상징국가 라고 할 수 있는 미국도 과거에는 정신질환자에 대한 ‘낙인’의 역사가 오래 지속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매우 권위적이고 폐쇄적인 정신병동에 갇혀 자유를 박탈당한 채 살아가는 정신병동의 환자들에게 나타난 한명의 교도소 수감자가 찾아오면서 그들의 둥지위로 날고자하는‘ 노력이 시작된다. 수감자인 맥 머피는 교도소에서 벗어나기 위해 미친 척 연기를 하여 결국 정신병원에 오게 된다. 하지만 정신병원은 교도소 보다 더 병리적인 곳이었다. 그들은 모두 수간호사 렛치드가 짠 스케줄 안에서 철저하게 통제되고 획일 적인 삶을 살고 있었다. 행여 그들이 반항이라도 할 시에는 치료를 가장한 전기충격을 받는 끔찍한 일도 일어나고 있었다. 이런 곳에서 맥 머피의 튀는 행동들은 눈에 거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환자들을 몰래 탈출시켜 낚시를 가거나 병동에 여자를 불러 술을 마시며 즐긴다. 그곳에는 다양한 증상의 환자들이 있다. 말을 매우 더듬거나 폭력적인 성향을 띈다거나 쉽게 흥분하고 또는 타인을 너무 의지하는 등의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병원 밖에 나가 충분히 잘 살 수 있는 정도의 증세를 가지고 있었다. 어쩌면 그들은 인간이 지니고 있는 특성 중 한 부분이 다소 지나친 평범한 사람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정신병원의 체제와, 수간호사의 권위적인 행동은 그들을 병원 바깥 사회의 사람들로부터 구별짓는 ’낙인‘을 찍었으며 그들 모두 충분히 스스로 병원에서 나갈 수 있는 자격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의지를 상실한 채 스스로를 병원에 가두었다. 말을 심하게 더듬던 환자 빌리는 평소 소심한 성격으로 여자와 연애를 하고 싶어 했고 어느 날 맥 머피가 불러들인 여자와 하룻밤을 잔 뒤 수간호사 렛치드 앞에서 당당히 말을 더듬지 않게 된다. 그러나 빌리의 어머니와 친구사이인 래치드는 어머니를 들먹이며 이 사실을 모두 말하겠다고 빌리를 협박한다. 그 순간 빌리의 증세는 다시 돌아왔고 그는 결국 자살을 선택한다. 당시 정신병원의 목적은 환자의 치료가 아니었던 것이다. 단지 병원은 정신질환자들을 ‘얌전한 사람들’로 만드는 것이 목적이었으며, 그 목적을 위해서는 약이던, 전기 충격이던 그 수단을 가리지 않았다. 아마 그들은 한 가지 사실을 잊고 있는 듯 했다. 그들도 인간이라는 사실을. 물론 이 영화는 다소 극단적으로 과거 정신병원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사람들을 자극시키고자 했을 것이다. 실제로 이 영화의 여파로 1970년대 초 미국의 정신보건체계에 큰 변화가 일었다고도 한다. 이는 미국 내 정신병원의 체제 개선 운동을 불러일으켰고 각 급 학교에서 원작을 교재로 채택할 정도의 파급 효과를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정신질환자들을 병원 밖으로, 즉 사회로 내보내자는 사람들의 의견이 점차 증가하기 시작했다. 40년 가까이 흐른 후 지금은 많은 것이 변화되었다. 영화 속의 장면들은 사실 지금은 상상 할 수 없는 것들이며, 현재와 너무 달라 전혀 공감할 수도 없다. 현재는 정신질환 외에도 다른 장애에 대한 의식 관심 등이 크게 늘어났고, 치료시설이나 교육프로그램의 개발도 주목할 만하다. 하지만 나는 이 영화를 보고 한 가지를 공감할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일반사람들이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이다. 물론 과거에 비하면 사람들의 인식은 상당히 개선되었다. 우리에게 이 영화가 너무 잔인하게 느껴지는 것이 그 사실을 말해 준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그들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며, 그들이 무언가를 해낼 수 있다는 ‘기대’를 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들을 우리보다 열등한 존재로 바라보며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그들을 도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영어에 Handicap이라는 단어가 있다. 미국에서는 현재 이 말을 장애인을 비하하는 뜻으로 여겨서 사용을 꺼린다고 한다. 하지만 이 언어의 어원은 말 경기에서 상대말보다 기량이 뛰어난 말에게 약한 말과 동등한 조건에서 경쟁하기위해 무거운 납을 얹었던 것에서 유래한다. 즉, handicap 은 ‘뛰어난 말’에게 주어지는 ‘불리한 조건’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The handicapped(장애인)은 우리보다 열등한 사람들도 아니며, 그들은 단지 ‘불리한 조건’을 지닌 사람들일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을 똑같은 인간 그 자체로 대해야 한다. 영화 속 정신질환자들은 모두 다 성인이며, 병동에 오기 전 연애를 하기도, 가정을 꾸리고 살기도 했던 사람들이다. 하지만 병원에서는 그들의 사소한 것까지 마치 어린아이를 다루듯 간섭하고 저지한다. 또한 치료과정에서 렛치드는 평소 아내의 외도를 끊임없이 의심했던 하딩의 문제를 논의하게 하는데, 하딩 본인은 너무나도 괴로워하며 그만 이야기를 끝내고자 하지만, 렛치드는 치료의 한 과정이라며, 계속해서 그에게 질문을 던진다. 그녀가 하딩을 심문하듯, 하딩이 괴로워하는 문제에 대해 계속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과연 치료일 지는 의문이나, 설사 그것이 치료의 한 과정이라고 하더라도 나는 그들에게 그것을 거부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에게도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고, 하기 싫은 일은 거부할 권리가 분명 있다. 내가 이번에 방문했던 소화자매원이 떠오른다. 그곳에서는 식사나, 간식 하나라도 선생님들이 직접 고르지 않고 그분들의 의견을 반영하거나, 말로 표현하지 못할 경우 사진을 보여주며 선택하도록 한다고 하셨다. 또한 그곳은 장애의 정도가 비슷한 사람들끼리 함께 거주하는 시스템을 가지고 있지만, 내부에서 적응을 하지 못하거나, 스스로 그곳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원하는 곳으로 이동 할 수 있게 한다고 한다. 이처럼 그들을 대할 때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그들의 의견을 존중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들을 대할 때는 물론이고 설령 호의를 베풀고자 할 때도 우리는 그들의 의견을 존중해 주어야 할 것이다. 아무리 말을 할 수 없고 몸도 움직일 수 없는 사람일 지언정 그 사람에게도 좋은 것과 싫은 것이 있을 것이다. 내가 다니는 교회에 몸도 움직일 수 없고 말도 할 수 없어 휠체어에만 앉아있던 한 언니가 있었다. 한동안 계속 교회에 잘 나오던 언니가 요즘 나오지 않는 것 같기에 엄마에게 소식을 물어보았다. 알고 보니, 요즘 그 언니가 어째서 인지 교회에 나오기를 꺼려한다는 것이다. 이유 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 언니의 어머니는 언니의 의사를 존중해서 언니를 교외에 대려오지 않으셨던 것이다. 말도 몸짓도 할 수 없는 언니였지만 그 언니도 표정으로, 눈빛으로 자신의 의사를 표현했을 것이다. 이렇게 잘 보고, 관심을 가지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사람들의 마음까지도 우리는 읽을 수 있어야 한다. 비록 그 수가 적고, 주류에 속하지 못하는 사람들이지만 그들도 우리 사회의 한 구성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들과 대화하고 소통하는 방법을 배워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