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신조학 고백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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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서평 신조학 고백록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신조학-고백록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은 읽고 이 책은 이해하기에 쉽지 않은 책이라 생각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북아프리카 작은 마을의 가톨릭 주교였고 그가 생존했던 그 당시에 위대한 영적 감화력을 끼쳤을 뿐만 아니라 오늘에 이르기까지 모든 그리스도교 문화와 서구 문명에 불을 지른 도화선이었다. 그는 히포에서 주교로서 사역을 시작하면서 A.D.397-401에 걸쳐 고백록을 집필하였고 고전적 자서전인 이 고백록을 통해 그의 젊은 시절의 감동적인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러나 이고백록 단순한 자서전 이상의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선하심에 대한 웅장한 찬양송이며 또한 그가 고백하고자 하는 것은 단순한 그의 죄악뿐만이 아니라 위대하신 하나님의 섭리와 은총에 대한 찬양이다. 그는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이 작품을 성서를 통해 얻은 영감으로 기록했으며, 본문에 기록된 “고백”의 의미는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신앙고백”이란 의미와 유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그의 서사시적 주제 전개와 이 작품 구조의 근간을 이루는 사상의 배경은 시간에 관한 개념으로, 그는 이에 관해 제11권에서 상술하고 있는데, 우리는 현재에서만 살고 생각할 수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과거란 지나간 시제이며 미래는 아직 실현되지 못한 시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 시제로부터 우리는 경험된 과거를 기억할 수 있고 현재 진행 중인 경험을 인지할 수 있으며 따라서 미래를 예견할 수도 있게 된다. 이는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시간의 개념이 형이하학적이며 물리학적 개념이라기보다는 의식의 심리학적 연장으로 이해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우리의 모든 심리적인 경험이나 지각 현상은 기억 능력으로 수용되는데, 과거 상황을 기억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현재나 미래까지도 기억할 수 있게 된다. 이에 근거해 고백록은 세 가지 부분으로 구분되어 역동적인 구조를 지니게 된다. 제1권부터 9권까지는 아우구스티누스와 과거에 대한 기억과 회상으로서 인간의 죄와 그를 도우시는 하나님의 은총과 관용에 관한 내용이고, 제10권은 두 번째 부분으로 아우구스티누스의 영적 현재 상태를 묘사해 주는데 그가 고백록을 기록할 당시의 주교로서 양심에 대한 문제를 술회하고 있다. 마지막 제3부는 제11권부터 13권까지로 하나님의 창조 계획과 목적으로 비추어 볼 때, 인생의 궁극적 의미에 관해 미래지향적으로 기록하며 이 마지막 부분은 실제적으로 창세기 서론에 관한 명상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이 고백록은 단편적으로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개인적인 인생담에 얽힌 시련과 승리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전체적으로는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그리스도인이 걸어가야 할 삶의 여정이라는 교훈을 준다.
내가 본 이 책의 저자인 아우구스티누스와 이 책에 나온 그의 인생에 관한 전반적인 내용은 이러하다. 그는 A.D.354년 아프리카 북쪽 해안에 위치한 항구 도시 히포로부터 내륙 쪽으로 50마일 정도 떨어진 곳에 자리 잡은 작은 마을 타가스테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 모니카와 아버지 파트리키우스는 집과 작은 토지를 소유했으나 그리 넉넉한 편은 아니었다. 어머니 모니카는 신앙열에 불붙은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녀의 훌륭한 신앙을 아우구스티누스에게 계숭시키기 위하여 여러 가지 중요한 교훈을 그에게 가르쳤다. 그러나 그녀는 아들에게 유아세례를 베풀게 하지는 않았다. 따라서 아우구스티누스는 명목상 그리스도교인이었을 뿐이고, 중생을 체험한 가톨릭교회의 교인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는 수년 동안 어느 소녀와 동거해 왔고, 372년에 아데오다투스라는 아들을 낳았고 그 다음 해에 마니교에 입교하여 약 9년 동안 충실한 마니교 신도로 살았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록과 신국론에서 이따금 카르타고에서 목격한 이교도들의 음란한 예식에 관하여 이야기한다. 특히 그가 몸담았던 마니교는 두 종류의 위대한 신인 빛과 선의 근원이요, 어두움과 악의 지배자를 숭배했고 모든 신앙과 신조를 이성으로 설명할 수 있고 또한 증명될 수 있다는 마니교의 교리는 아우구스티누스로 하여금 깊은 관심과 매력을 느끼게 하였다. 그리고 그는 철학에 관한 정규 과정을 교육받은 일도 없었으나, 독학으로 키케로의 호로텐시우스를 읽고 난 후 철학적 지혜에 관하여 깊은 애정과 열정을 지니게 되었다. 그렇게 그는 학문적 열정에 불탔던 20대에, 유명한 마니교 감독 파우스투스를 만났으나, 파우스투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질문에 답변을 할 수 없었고 이후 아우구스티누스는 마니교로부터 실망과 환멸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그는 로마제국의 심장부인 로마로 가서 보다 우수한 학생들과 더불어 학문을 논하며 수사학의 대가로서 성공하려는 열망을 품게 되었으나 로마에 도착한 그는 병을 앓게 되었다. 또한 그 당시 마니교도와 완전히 최후의 결별을 선언하게 되었고 일시적으로 회의주의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다 384년 수사학 교사로 임명되었고 그 후 다사다난한 2년을 밀라노에서 보냈는데, 이 밀라노는 아우구스티누스가 그리스도교로 개종하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준 사람을 만나게 된 곳이기도 하다. 그는 이 밀라노에서 많은 친구들과 교제를 나눴는데, 그 가운데는 카톨릭 주교였던 유명한 성 암브로시우스가 있고 나이 많은 사제 심플리키아누스도 있다. 그리고 당시 밀라노는 신 플라톤 철학파의 전성기였는데, 이곳에서 어떻게 아우구스티누스가 이 유물론 사상의 한계점을 이해하며 초극하게 되어 세상에 속한 육적 쾌락을 버리고 하나님의 사랑에 헌신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그의 회심 단계는 제 5권으로부터 8권에 상술 되어있다. 그리고 386년 여름 어느 날, 그에게 성경을 “펼쳐 읽으라”고 들려진 찬양의 음성은 참으로 오랜 세월에 걸친 긴 방황의 끝을 알려주는 클라이막스였다. 그 후 387년 부활절 전 토요일 오후, 성 암브로시우스는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그리고 387년 늦은 봄날 어머니 모니카의 충격적인 죽음에 관한 기사가 제9권에 기록되어있다. 391년 여행 도중에 히포에서 사제의 서품을 받았고 성직자로서 그의 활동적인 생애가 시작되어 4년 후 히포의 보조감독이 되었고, 396년에 히포의 감독이 된다.
이제 이 책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글을 평가하고자 한다. 먼저, 이글을 읽고 든 첫 생각은 아우구스티누스의 하나님의 섭리하심과 하나님 그분에 대한 생각과 그 깊이가 매우 놀랍다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을 믿기 전부터 많은 생각과 질문을 던지며 살아온 인물로 하나님을 믿고 난 뒤,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성경 말씀에 충실하고자 애썼던 인물로 느껴진다. 뿐만 아니라 모든 지혜를 하나님으로부터 받고자 기도하며 그 지혜가 하나님으로부터 왔음에 대한 확신이 넘친다. 즉, 코람데오의 삶이 그분의 삶에 묻어있음을 느끼게 된다. 물론 그 확신이 항상 옳다고만은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저자는 유아시절 하나님을 믿기 전이나, 그때의 하나님의 보호와 영원한 섭리를 찬양한다. 그는 하나님께서 만물을 지탱하는 그 규례와 은택에 따라 육신의 부모를 통하여 그에게 유아 시절의 양식을 주셨고 자신으로 주님이 주신 것으로 만족하게 하신 것도 주님이시며 자신을 키운 이들에게 주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것을 자신에게 줄 뜻을 주신 것도 주님이셨음을 고백한다. 또한 그들이 본능적 애정으로 주님이 넘치도록 공급하신 것을 자신에게 기꺼이 주려고 했으며 자신의 선은 그들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그들을 통하여 왔으며 모든 선한 것이 주님으로부터 왔음을 고백한다. 그러나 그 가운데 지금은 잘 기억하지 못하나 자신이 목격한 아이들을 통해, 역시 울음으로써 자신에게 선을 베푼 그들에게 앙갚음한 어린 시절 자신의 모습에 대한 지식을 이야기 하며 자신이 죄악 중에 출생했음을 고백한다. 이는 나 역시 동일하게 고백하는 내용으로 하나님을 믿고 구원의 확신이 들었을 때, 가장 먼저 하게 되는 생각 중 하나로 과연 하나님은 내가 구원을 받기 전에 나 개인을 향하여 무엇을 하고 계셨으며 나는 무엇을 하며 살았는지를 고민할 때, 죄 된 가운데 하나님을 생각한 적도 없고 하나님을 신앙한 적 없는 나를 불쌍히 여기사 생명의 근원되신 주께서 지키셨음을 고백하며, 특히 모든 돌보심에서 하나님의 선이 나를 보호하고 이끄시고 계셨음을 고백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나 개인적로, 끊임없는 사탄의 역사와 간섭역시 허락하시는 주님이심을 보게 된다. 이는 선하신 하나님께서 그분의 때에, 그분의 살아계심을, 죽은 나로 하여금, 사탄의 지배아래 놓여있는 나로 하여금, 확실히 깨닫게 하사 오직 하나님을 찬양하며 경배하게 하시는 그분의 섭리임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아우구스티누스는 에피쿠로스의 견해를 믿는 가운데, 죽음과 주님의 장차 심판에 대한 두려움 외에는 육욕적 쾌락에 자신을 깊이 빠지지 않도록 부르는 것이 없었다고 말한다. 이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는 역시 동일한 두려움으로 이것이 하나님을 믿도록 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지만 반대로 하나님이 아닌 다른 존재를 향해 나아가는 경우로 이어 지기도 한다. 왜냐하면 인생은 타락하고 눈멀어서, 그 자체로 받아들여야 할 덕과 아름다움의 빛을 분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하길, 이전에 잃어버릴까 두려워하던 것을 없애는 것이 기쁨이 되었다고 한다. 이는 참되고 최고의 기쁨이신 주님이 그것들을 자신에게서 내던지셨고 그 대신에 주님이 친히 들어왔다고 한다. 그리하여 혈과 육에 대한 기쁨이 아니라도 모든 쾌락보다 감미로우시며, 모든 빛보다 밝으시나, 모든 비밀보다 가려져 계시며, 모든 존귀보다 높으신 주님을 향하게 되며 자신의 영혼이, 추구하며 얻으며 진흙탕에서 뒹굴며 정욕의 가려움을 긁는 저 좀쓸 듯하는 염려에서 벗어났음을 고백한다. 실로 그러하다 생각한다. 나 역시 하나님을 믿게 되면서 늘 따르던 귀신에 대한 공포와 내 삶에 대한 불안이 사라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대신 그 자리에 주님께서 임재하사 나의 생각과 마음을 지키시며 평강을 부어 주사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채우심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와 아직 아니’ 사이에 있듯이 우리 안에 육신의 정욕과 성령의 소욕이 다투고 있기에 나의 구원자 되신 주님을 한 번 고백한 것으로 혹은 한번 경험한 것으로 혹은 어느 시기에 제한 된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고백되어지는 매순간의 삶을 살아야함을 깨닫게 된다. 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