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와 문학 - 성서를 읽는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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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와 문학 - 성서를 읽는다는 것
‘성서’란 66권의 책을 한 권으로 엮어놓은 일종의 전집으로, 구약 39권과 신약 27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저자와 기록의 시기는 모두 다르며, 때문에 주제와 서술방식, 관점과 강조점에도 차이가 있다. 이러한 점에서 성서의 각 책들은 각자의 고유하고 다양한 관점으로 주제를 전하고, 각각의 서술이 상호보완적이기도 하지만, 때론 상호 충돌하기도 하는 이유다. 이것은 성서를 번역하는데 커다란 어려움이 되기도 하는데, 구약은 히브리어로, 신약은 그리스어로 이루어져 있는데다가 당시 사회와 문화가 다르기 때문에, 언어와 문화를 제대로 이해하고 써야 하는 번역 같은 경우 성서는 특히 어려울 수 있다. 때문에 한 시대에서도 성서는 다양하게 번역될 수 있고, 여러 번 번역될 수 있는 것이다.
고대로 돌아가자면 책이라는 것은 일종의 권력과 왕족의 상징이었다. 책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큰 역할이 됐다. 이 책 자체에 권력층이 자신의 권력을 합리화시키기 위한 스테레오타입을 주입시키면 독자층이나 소위 계급의 하층은 그것을 믿고 내면화하는 것이다. 성서에서 창세기가 아니라 출애굽기가 중요했던 가장 큰 이유는 이러한 스테레오타입을 깨버리고 지배층이 아니라 피지배층을 주인공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제국을 벗어난 노예들이 이스라엘, 즉 노예들의 나라에서 쓰이는 히브리어로 구약이 적혀 있는 이유다.
그러나 이후 교회가 왕보다 더 많은 권력을 얻게 되면서 사람들은 종교개혁운동을 벌인다. 그리고 이 운동에 중심이 된 것이 바로 ‘성서읽기’다. 교회에서의 성서 읽기는 오히려 사람들을 지배하는데 이용했기 때문에, 그 당시 종교 권력으로 세상을 더럽혔던 교회를 더는 믿을 수 없게 만들었던 것이다. 이에 사람들은 단순히 교회에서 읽어주는 것이 아니라 성서를 ‘내가 스스로 읽는다’는 종교개혁을 이끌었다.
우리나라는 특유의 유교식 경전읽기, 독서백편의자현 (아무리 어려운 글이라도 백번을 읽으면 통한다)에 익숙해져 있다. 즉 우리나라에서 ‘성서읽기’는 묵묵히 전부 다 읽고, 읽고 나서도 이해가 되지 않으면 또 읽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오히려 사람들의 이해를 방해한다. 시간을 내서 통독, 성서를 이해하기 위해 짧은 시간에 빠른 속도로 읽다가는 영원히 하나님을 알아가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기 위한 성서 읽기를 할 수 없다. 진정한 성서 읽기를 위해서는 단순히 읽고 이해한다는 것에 집중을 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파악하고 그것에 대한 주제가 무엇인지, 하나님과 예수님을 어떻게 서술하고 있는지 등에 대해 깊이 생각해야 한다.
나는 교회와 참 인연이 많았다. 우리 집은 절대 기독교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교회에서 운영하는 유치원을 나왔다. 초등학생 때는 집으로 가는 길에 교회가 있었고, 그 교회에서 토요일마다 떡볶이를 나눠주었었다. 그리고 그 교회에서는 떡볶이를 줄 때마다 교회를 구경하고 가라고 했었고, 그 교회는 갓 지어졌기 때문에 내부가 상당히 아름다워 어린아이의 이목을 사로잡기엔 충분했다. 나는 실제로도 그러한 이유로 교회를 다녔다가 이사 후엔 다니지 않게 되었다. 중학교 때는 친구가 기독교였고, 고등학교 때는 사립으로 교회를 재단으로 두고 있었고, 지금의 대학교는 기독교를 기반으로 세워진 학교였다.
이러한 이유로 나는 성서를 접할 기회가 많았다. 특히 고등학교 때 입학 기념으로 전교생에게 성서를 나누어주었다. 지금은 수능 이후 책 정리를 하면서 잃어버렸다. 하지만 1학년 때 성서를 이왕에 받았으니 읽어보기로 하여 창세기를 읽었다. 창세기는 생각보다 재미가 없었다. 세상을 신이 창조했다는 이야기는 어떤 판타지에서나 읽을 수 있었던 법이었으니까. 때문에 나는 오히려 그 뒷이야기가 좀 더 맘에 들었다. 수많은 노예들을 이끌고 억압과 폭력에서 벗어나 새로운 국가를 세우는 이야기. 노예가 주인공이 되는 이야기. 노예들의 나라, 노예들이 해방된 나라를 세우는 그 이야기야말로 성서의 중심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중심으로 종교로 발전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세상을 창조하는 이야기보다 우리가 어떻게 좀 더 평등할 수 있고 억압과 폭력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지, 평범한 사람라면 전부 흥미를 가질 수 있을 거라 생각하기 때문에.
그리고 이러한 생각에서 나는 읽기에 대한 의견을 생각할 수 있었다. 즉 가슴 속 깊이 느끼는 읽기야 말로, 이해를 위한 수 백 번 읽기보다 훨씬 옳다는 것. 어떤 책이든 간에 읽을 때마다 든 머릿속에서 넣어두고 읽어야 하는 것.
굳이 성서가 아니더라도 그렇다. 모든 문학을 읽기 위해서는 이해가 안 간다고 수 백 번이고 읽기보다 무언가 자신의 마음을 찡하게 만드는 것을 찾아야한다. 또한 그것뿐만이 아니라 비판적 읽기도 필요하다. 내용 전부를 옳다고 읽기보다 한 문장 문장에도 우리는 의문을 가져야만 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공부를 할 때에도 머릿속에 남는 것이 있고, 진정한 이해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성서 또한 그러한 읽기를 통해 예수님과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게 될 거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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