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신정권 해체기의 정치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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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무신정권 해체기의 정치과정-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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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무신정권 해체기의 정치과정-4
 5  무신정권 해체기의 정치과정-5
 6  무신정권 해체기의 정치과정-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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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무신정권 해체기의 정치과정
《목차》
1. 머리말
2. 대몽항쟁과 최씨정권의 붕괴
1) 대몽항쟁
2) 최씨정권의 붕괴와 강화론의 성장
3. 김준임연 정권의 성립과 붕괴
1) 김준임연 시기의 정치운영
2) 김준임연 시기의 대몽관계 - 국왕폐위와 관련하여
4. 무신정권 몰락후의 무반
1) 무신정권의 해체
2) 몽고 압박기의 무반
3) 武班官職의 성격의 변질
5. 맺음말
1. 머리말
최씨정권은 무신 난 이후 60년을 고려의 정국을 주도한 정권이었다. 이러한 최씨정권은 최충헌, 최우, 최항, 최의 4대에 걸쳐 이루어졌으며, 결국 자신들의 가노인 김준에 의해 최의가 제거됨으로 그 끝을 맞이하게 된다. 강력한 권력을 행사하며 고려를 장악했던 최씨정권이 붕괴는 어떻게 이루어졌을까. 이 붕괴의 원인에는 대외적으로 몽고와의 오랜 항쟁과 대내적으로 정권 지배력의 약화가 있다. 이러한 원인들을 이유로 결국 최씨정권은 붕괴되었으나 이후 등장한 김준과 임연에 의해 무신정권은 짧은 기간 동안 다시 존속하게 된다. 하지만 결국 몽고와의 강화를 통해 왕정복고가 이루어지고 김준과 임연이 모두 제거됨으로 100년에 가까운 무신집권기는 막을 내리게 된다. 이 과정 속에서 어떠한 정치적 변화가 있었고, 이러한 변화의 원인은 무엇인가를 살피는 것이 이번 발제의 목적이다.
2. 대몽항쟁과 최씨정권의 붕괴
1) 대몽항쟁
(1) 1~4차 침략
몽고의 침략에 대한 고려의 항쟁은 고종(高宗)18년(1231)에 시작되어 고종 46(1259)년까지 약 30년의 오랜 기간에 걸쳐 전개되었다. 당시 집권세력이었던 최씨정권이었고 이들은 적극적인 항전을 내세우며 몽고와의 전쟁을 주도하였다. 처음 고려가 몽고와 관계를 맺은 것은 고종 6년(1219) 강동성에서 거란족을 함께 섬멸한 직후의 일로, 이 때 통교의 조건으로 합의된 것은 고려가 몽고에 세공을 납부한다는 것이었다. 세공을 납부한다는 것은 고려에 비해 몽고의 강성함을 인정한 것으로 이는 고종8년의 사료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저들은 군사가 많고 우리는 적습니다. 만약 사신을 맞아들이지 않으면 저들은 반드시 쳐들어 올 것이니, 어찌 적은 것으로써 많은 것을 대적하며, 약한 것으로써 강한 것을 대적할 수 있겠습니까. 『高麗史』 卷 22, 世家22 高宗 8년 9월.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몽고와의 관계를 유지해오던 중 고종12년에 몽고 사신이 피살되는 사건이 발생하고, 이 후 6년 뒤인 고종18년(1231) 8월부터 몽고의 침략이 시작되었다. 몽고의 침략은 6차에 걸쳐 전쟁과 휴전이 반복적으로 이루어졌다. 몽고의 1차 침략은 최우(崔瑀)시기에 이루어졌는데 공물(貢物)의 납부와 납질(納質)·조군(助軍) 그리고 다루가치 설치 등 ‘6사‘의 부분적인 수용을 조건으로 강화(講話)가 이루어졌다. 이 1차 침략의 강화와 동시에 서울을 개경에서 강화로 옮기자는 논의가 본격화 되었고, 본격적인 몽고에 대한 항쟁에 들어가게 되었다. 최우에 의해 주도된 강화천도 논의에 있어 대부분의 신료들은 반대의견을 내지 못하였고, 참지정사(參知政事) 유승단(兪升旦), 야별초지유(夜別抄指諭) 김세충(金世沖)은 천도를 반대하다 최우에 의해 죽임을 당하였다. 『高麗史』 卷 23, 世家23 高宗 19년 8월.
이러한 천도는 민심을 이탈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으나, 2차 침략 때 처인성에서 김윤후가 적장인 살리타를 사살하고 몽고군을 물리침으로써 『高麗史』 卷 23, 世家23 高宗 19년 12월.
항전에 대한 의지는 강화되었다. 고종22(1235)부터 시작된 몽고의 3차 침략으로 고려는 공물의 납부와 납질, 국왕의 친조(親朝)를 약속하고 또 다시 강화를 성립하였다. 이에 따라 다른 조건들은 수행하였으나 국왕의 친조는 이행하지는 않았다. 이렇듯 강화조건을 모두 수행하지 않은 가운데 고종34년(1242)에 몽고의 4차 침략이 이루어졌으나 몽고 내부적 문제로 인해 곧 회군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몽고와의 전쟁에서 항전론(抗戰論)이 우세하게 된 원인으로 작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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