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16 군사 쿠데타와 박정희 정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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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516 군사 쿠데타와 박정희 정권-
Ⅰ. 516 군사쿠데타와 군부독재체제의 성립.
1. 516 쿠데타의 배경.
1950년대 한국자본주의의 구조적 위기가 반독재민주화투쟁의 형태로 나타났던 4월 혁명은 그것에 나타난 변혁의 요구를 정치권력으로 전환시키지 못하고 새로운 반동에 직면하게 되는데, 1961년 5월 16일 박정희를 중심으로 일부 군인들에 의해서 일어난 군사쿠데타가 바로 그것이다. 5. 16쿠데타를 일으킨 군부세력은 장도영을 의장으로 하고 박정희를 부의장으로 하는 군사혁명위원회를 구성하는 한편,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며 군부의 정치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준비에 돌입하기 시작하였다. 즉 5월 18일 장면정권의 총사직, 5월 19일 국가재건최고회의(의장: 장도영, 부의장: 박정희)구성, 5월 20일 장도영을 내각수반 겸 국방장관으로 하는 군사내각 발족, 5월 23일 6개 혁명공약 발표, 6월 6일 국가재건비상조치법 제정, 공포 등 일련의 조치를 통해 정변주도세력의 내부체제를 정비하고 명실상부하게 입법, 사법, 행정의 3권을 장악한 군사정권을 출범시켰다.
쿠데타 발생당시 장면총리는 수녀원으로 피신하여 48시간 동안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으며, 윤보선 대통령은 쿠데타 세력을 인정하고 이를 지지하였다. 윤보선 대통령은 주한 유엔군 사령관이 쿠데타 군을 무력으로 진압하자고 강권했을 때도 이를 거절했고, 오히려 군 출동 금비 서한을 야전군 사령관들에게 발송하는 등, 쿠데타를 인정하고 그들의 활동을 지지하는 행동을 하였다. 동족 사이의 유혈방지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쿠데타를 묵인한 윤보선 대통령의 행동과 쿠데타 주체세력이 정치적 노선이 그들과는 달랐던 장도영을 국가재건최고회의의 초대 의장을 내세워 형식적인 바람막이로서의 역할을 시킨 것 등이 미군이 직접적으로 쿠데타를 저지하지 못했던 주요 요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쿠데타 발생의 원인은 주요하게 당시 경제적인 어려움을 통한 사회의 혼란과 장면정부에 대한 국민적 불신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1950년대부터의 한국경제의 구조를 통해 그 원인을 살펴볼 수 있는데, 1950년대 미국의 원조에 기반하여 수년간 성장을 거듭하던 한국경제는 1957년을 고비로 위기에 봉착하였는데, 이것은 다음의 몇 가지 원인에 기인한다. 그 주요한 원인 중 하나는 미국원조정책의 변화와 원조의 감소이다. 미국 원조정책의 전환은 미국의 국제수지 악화와 국제 경제적 상황변화, 즉 2차대전 이후 미국의 마셜플랜에 의해 집중적인 지원을 받았던 일본과 유럽공동체 자본주의가 1950년대 후반 들어 2차대전 이전 수준으로 경제력을 회복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국은 전세계적으로 무상원조 위주의 원조정책에서 원조의 양을 줄이고 유상원조로 전환시키거나 차관으로의 이전을 모색하였고, 그 결과 1958년부터 미국의 원조액이 급감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미국의 절대적으로 의존하였던 한국경제는 위기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인한 국내경기의 침체는 4월 혁명이라는 반독재민주화투쟁을 낳는 주요한 배경이 되었고, 그 결과 이승만 정권을 붕괴시켰다. 그러나 4월 혁명의 결과로 수립된 민주당 정권은 자본의 생산구조에 객관적으로 조응하지도 못했으며, 경제적 문제의 해결에 무기력하였다. 게다가 집권층 내부에서 민주당 신, 구파의 분열이 가속화됨으로써 4월 혁명의 기본정신인 민주와 자주, 그리고 통일의 과업을 전혀 추진해갈 수 없었다. 또한 4월 혁명을 일으킨 주도세력들인 학생과 지식인들도 당시 한국사회가 처해있던 구조적 상황에 대한 불철저한 인식과 대안부재로 말미암아 당시의 정권을 강제해 내지 못했다.
이러한 정치적 상황 속에서 한국전쟁 이전에는 10만 여명에 불과하였던 군부가 1954년에는 65만의 대군으로 성장하여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등장하였던 것이다. 군부의 등장은 물론 그 내부의 요인도 5. 16쿠데타의 원인이 된다. 즉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급속히 증가한 군부 내의 인사적체와 각종 부정부패와 같은 요인이 박정희를 중심으로 한 소장군부세력들로 하여금 정치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조직화될 수 있도록 촉발시켰던 것이다.
2. 군사정권의 정책과 5. 16쿠데타의 성격.
군정기간 동안 5. 16 주체세력이 당면한 과제는 자신의 조직기반 강화와 대안의 제시를 통한 국민적 정통성 확보로 집약할 수 있다. 먼저 5. 16 주체세력들의 조직기반 마련을 위한 노력은 첫째 기성 정치인의 정치, 사회활동 제한, 둘째 언론, 출판 등에 대한 영향력 확보, 셋째 군부 내의 자체정비 등을 들 수 있다. 먼저 기성정치인의 정치, 사회활동 제한을 위한 조치는 5. 16 직후 집회, 시위, 결사의 금지, 국회 및 지방의회 해산 등으로 시작되었으며, 구호, 학술, 종교단체 이외의 모든 정당사회단체에 대한 활동금지성명으로 15개 정당과 238개의 여타 단체를 해산하는 것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1962년 3월 16일에는 약 4,400여명의 구정치인의 정치활동을 규제한 정치활동정화법을, 12월 31일에는 정당법과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을 공포하여 군사정권 이외의 모든 정당과 사회단체의 정치, 사회활동을 금지시켰다.
이와 더불어 5. 16 군사쿠데타의 정당성을 선전하고 이에 저항하는 주장을 탄압하기 위해 언론, 출판에 대한 억압도 자행했다. 5월 16일 언론, 출판, 보도의 사전검열명령에 이어서 5월 28일 830여 종의 중앙, 지방신문과 통신사, 그리고 370여 출판기관에 대한 폐쇄령 등의 일련의 조치로 인해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는 박탈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