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기독교조선교단에 대한 에큐메니칼 의미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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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일본기독교조선교단에 대한 에큐메니칼 의미 이해
1. 서론
1945년 7월 19일, 한국 교회 역사에 있어서 최초의 교파합동 단일 교회가 설립된다. ‘일본기독교조선교단’(이하 ‘조선교단’)이 바로 그것이다. 조선교단은 외형상 교파합동 단일 교회로서 한국 교회의 에큐메니칼 정신을 연구하는데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사건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조선교단은 그 설립 과정에서 발생한 일본제국주의(이하 ‘일제’)의 ‘강제성’과 ‘어용성’ 때문에 한국 교회의 에큐메니칼 역사에 있어서 그 가치나 성과가 높이 평가 받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조선교단의 설립 과정에 있어서 주체적 동력으로 작용했던 일제의 의도가 ‘교회’가 가지고 있는 가치에 부합하지 못하였고, 그 과정에 있어서도 합리적이고 정당한 절차에 의해 진행되지 않았다는 것에 있다.
그러나 조선교단이 한국 교회의 에큐메니칼 역사에 있어서 긍정적인 관점에서 볼 때에는 그 의미와 가치가 많이 떨어지는 게 사실이나 조선교단이 한국 교회의 에큐메니칼 역사를 서술하는데 있어서 그 존재성은 절대로 부정될 수 없다. 에큐메니칼 신학의 가치는 연합과 통합을 지향하는 긍정적인 의도와 과정 속에서 이해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에큐메니칼 신학이 발현되고 있는 컨텍스트 현장에서의 의도되지 않았던 환경과 사건 그리고 부정적인 의도와 갈등의 과정 등도 모두 관계적으로 분석하고 해석해 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조선교단은 그 설립 과정에 있어서의 정당한 절차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부분과 각 교파의 교리적 합의와 일치에 대한 논의가 충분하지 않았다는 점 그리고 조선교단 설립을 주도했던 주체적 세력이 정당성을 가지지 못한다는 한계점은 있지만, 그러한 요소들도 에큐메니칼 신학의 관점에서는 그 의미를 보다 구체적으로 평가해야하는 측면이 있다.
본 발제는 조선교단의 설립에 있어서 주체적 세력이 되었던 일제의 역할에 대해 관심을 두고, 일제가 조선교단 설립을 위해서 어떠한 노력을 기울여 왔는지에 주목해 보고자 한다. 또한 조선교단이 가지는 교파합동 단일 교회로서의 한계와 주체적 동력으로서의 일제의 역할에 중점을 두고 살펴나갈 것이다. 이러한 전개과정을 통해서 일본기독교조선교단이 한국 교회의 에큐메니칼 신학의 측면에 있어서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지 분석해 보고자 한다.
2. 일제의 종교보국(宗敎保國) 정책
“일제는 1931년 만주침략, 1932년 상해침공, 1937년 중일전쟁, 1941년 태평양전쟁을 도발하여 1945년 패전하기까지 15년에 걸친 침략전쟁을 감행하였다. 또한 침략전쟁의 수행을 위하여 식민지 한국을 대륙침략을 위한 병참기지로 개편하고, 물자와 인력의 수탈동원체제를 구축하는 한편, 수탈을 극대화하기 위하여 한국인의 정신생활까지도 통제하였다.”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한국 기독교의 역사Ⅱ」(기독교문사, 1990), 274.
일제는 대내외적으로 직면한 위기를 적극적으로 타개하기 위해서 식민지 한국에도 그 역할을 분담할 것을 요구하였다. 즉, 일제는 ‘내선일체론’(內鮮一體論) 내선일체론은 “한국 민족은 일본 민족과 운명을 같이하는 일본 민족 속의 일부이며, 소위 흥아적(興亞的) 민족 해방의 대상이 아니라 일본 민족과 함께 아시아 제 민족을 서구 제국주의의 압제로부터 해방시켜야 할 주체”라는 일제의 식민지 정책,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같은 책, 274.
을 주장하면서, 기독교 역시 위기에 닥친 황국(皇國)을 위해서 가진 모든 역량을 동원할 것을 요구하게 되었다. 더 나아가 일제는 기독교단체를 하나로 흡수 통합하여 식민지 정책을 추진하는데 보다 손쉽게 통제하려 하였다. “1937년 중일전쟁 후 조선총독부 경무국이 ‘일선기독교일체화운동’(日鮮基督敎一化運動)을 방침으로 정하였다” 김인수, 「일제의 한국 교회 박해사」(대한기독교서회, 2006), 173.
는 사실과 1937년 ‘종교단체법’이 공포된 점, 그리고 그 이후에 진행된 일제의 기독교 단체에 대한 통합과 해산의 의지와 노력 일제는 1936년 ‘조선기독교 연합공의회’ 해산, 1938년 ‘조선기독청년회(YMCA)’와 ‘여자기독청년회(YWCA)’가 일본기독교청년회 및 일본 기독교 여자 청년회에 강압적으로 가입, 1938년 전선(全鮮)주일학교연합회 해체, 1942년 성서공회 재산 몰수 등의 정책을 실행하였다., 전택부, 「한국교회발전사」(대한기독출판사, 1987), 250-252.;김인수, 같은 책, 117.
등은 일제가 기독교를 일제의 보국화(保國化) 도구로 이용하려는 시도를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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