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의 이후부터 1960년대까지의 한국교회의 교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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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의 이후부터 1960년대까지의 한국교회의 교회사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해방의 이후부터 1960년대까지의 한국교회의 교회사
우리나라의 현대사(1900-2000)는 외세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 시기와 분단의 시기로 나누어서 생각할 수 있고, 아직도 분단의 시기에서 살고 있다. 이글에서는 1945-1950년까지의 분단의 형성기와 1951-1960년까지의 분단의 고착기로 나누어서 우리의 분단사에 대해 기술하고 또한 한국교회의 통일에 대한 책임과 해방과 분단에 대한 한국교회의 인식에 대해 서술하고자 한다.
먼저 1945년 일제로부터 해방을 하였으나 미소 양국간의 신탁통치를 위한 38선이 만들어지고, 결국 1948년에는 대한민국정부(1848.8.15)가 먼저 설립되고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1948.9.9)이 각각 설립되는 분단 정부 수립이 되는 역사를 가지게 된다. 이때 분단국가 반대 투쟁도 많이 일어나게 되지만 결국 친미 반공 세력의 호전적 성격을 가진 이승만 정권의 득세로 북한을 무력으로 통일하려는 목표를 가진 세력이 득세를 하였다.
이런 역사적 사실에 있어서 한국교회는 국가재건 참여와 좌우 대립의 역사를 경험하게 된다. 신사참배 반대로 투옥되었다가 출옥한 성도들에 의한 ‘교회의 재건’은 개교회적 차원에서의 교회 건물 정비나 조직 정비를 의미했고, 교단적 차원에서는 일본 교단으로의 편입에서 본래의 교단으로 돌아오는 것이거나, 교단을 복구하는 것이었다. 한편, 한국 교회 ‘국가재건’의 초기단계는 일제가 물러나고 난 치안 공백을 메우는 형식이었다.
이북에서의 소련군이 북한 지역을 장악하기위해서는 교회가 박해의 대상이 되어 갔다. 또한 남한에서도 좌파의 성격을 띤 기독교 자치 조직은 미군의 탄압의 대상이 되었는데 이것은 향후 한국 교회 안에서 서로 대립의 길로 갈 것임을 예고한 것이기도 하였다. 일부 공산주의를 수용하는 기독교입장도 있었지만, 한국교회와 공산주의의 대립은 남북에서 해방이후 곧바로 다시 재연되었다. 먼저 북에서는 ‘기독교 사회민주당’(1945.9.18)의 출현과 ‘신의주 학생사건’(1945.11.16)에서 알 수 있듯이 기독교와 공산주의 사이의 대립은 공산주의의 일방적인 힘의 우위로 진행되었고, 조직적 대응방안의 하나로 ‘이북5도연합노회’(1945.12.13)를 조직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결국 공산주의자들의 무차별한 기독교 박해로 인해 이북의 기독교 지도자들은 대단위로 남하하게 만들었다.
반면 남한교회의 상황은 친일 성향의 ‘일본기독교 조선교단’(1945.8.1)의 존속을 찬성하는 파와 ‘조선기독청년전국연합회’(1945.11.26)는 남한 교회 중심의 교회재건과 복음주의에 기초한 국가 재건이라는 분명한 원칙이 재확인되고 있다. 그러나 미국에서 이승만과 임시정부요인들이 귀국함에 따라 남한의 우익간에 불협화가 생기게 되었고, 좌파는 좌파대로 세력을 더 확산시켜 나갔다. 이승만의 노선을 따르는‘독립촉성기독중앙협의회(1945.11.27)’와 김구, 김규식의 임정계의 ‘한국독립당’, 그리고 좌익 계열은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를 중심으로 뭉치는 크게 세 흐름으로 나뉘어졌고, 이런 남한 교회의 정치적 성향은 ‘우파’, ‘좌파’, ‘중도파’로 분류할 수 있게 한다.
그럼 다음으로 교회의 분열의 역사에 대해 기술하고자 한다. 장로교회의 분열은 가장 큰 교단으로 큰 교단인 만큼 많은 분열의 아픔이 있었다. 분열의 큰 원인들을 살펴보면 첫째로 신사참배 문제로 인한 분열이 있었으며, 둘째로는 자유주의 신학사상 대두로 인한 분열과 N.A.E.와 W.C.C의 대립으로 인한 분열의 세 가지 큰 사건으로 나눌 수 있다.
1945년 해방을 맞았을 때 한국 교회는 해방 이전의 교회가 내포 했던 문제들을 극복하면서 부흥 재건하는 양상을 보였다. 그 하나는 주체성을 상실하고 교회로서의 정체를 상실 하였던 그리스도의 공동체를 본래의 한국 교회의 모습으로 재건하는 일 이었다. 그중 하나가 교회의 정통이 일제하의 강요에 따라서 신사참배나 일본 기독교조선교단으로서의 통합 때문에 패멸되었다고 보고, 그 이전의 순수 정통에로 회기 한다는 운동이었다. 그 이후 소위 고신파의 분립이 1950년 4월에 표면화되기 시작 하였고 이 즈음에 조신파 (현재의기독교 장로회) 역시 신학적 사상에 대한 성서의 소위 고등비평과 역사적 비판 등을 이유로 예장과 분립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조신파의 방법론들은 보수주의나 근본주의 일색으로 목회자양성을 실시해온 장로교에 충격을 주었다.
김재준 목사와 박형용 목사 두 거목의 사상은 대립하게 되었고 박목사는 김 교수가 한국교회를 능욕한다고 까지 힐책 하였다. 이러한 문제로 장로교회는 총회에서 새로운 장로회 신학교를 개교하고 기존의 조선 신학교와(한국 신학대학) 두개의 신학적 대립의 신학교가 탄생된 것이다. 이렇게 해서 예장총회는 대한민국에는 예장 총회는 하나 밖에 없다고 성명서를 제출하게 되었고 조선신학교 측은 새로운 대한 기독교장로회라는 교단을 조직하게 되었다.(1954) 그 이후 기장은 1957년 10월에 한국 기독교교회 연합회(NCC)에 가입하였고 같은 해 한국 세계기독교봉사회에 가입하였으며, 1959년에는 동남아시아 기독교협의회(EACC, CCA의 전신) 그리고 세계교회협의회(WCC)에 가입하여 교단으로써 신학적 입장을 분명히 하고 독립된 교회의 기구로서의 출발을 다짐하였다.
그런데 1959년 예장은 다시 합동파와 통합파로 분립 하게 되었다. 합동파에서는 1960년 12월 비상사태 속에서 고신파와 합동해서 대한예수교 장로회 합동 총회를 조직하게 된 것이다. NAE계의 목사들은 WCC가 용공적이라고 공격하고, 한국교회의 반공이념과 신앙의 순수성보존을 위해 WCC에서 탈퇴할 것을 그동안 주장해 왔다. 그런데 1959년 대전총회에서 경기노회의 총대 명단의 조작성 여부의 문제로 양쪽의 주장이 충돌하여 마침내 분립까지 치닫게 되었던 것이다. 통합파는 곧 서울 연동 교회에서 속회를 가지고 비상사태를 선언하면서, WCC에서의 잠정적 탈퇴를 하면서 합동파와의 재결합을 모색 한다고 하였으나 그것이 그 시기에 제출된 제안은 아니었다. 반대로 합동파 에서는 서울 승동 교회 에서 속회하여 당장 WCC에서 영구 탈퇴 하고 어떠한 형태의 에큐메니칼 운동도 반대하며, 한국NCC와도 관계를 단절한다고 선언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합동파의 역사도 그 이후 기복이 많았다. 1962년에는 ICCC탈퇴 문제로 박병훈계가 호헌파로 분열되고 1963년 9월 고려파가 옛 고려파 총회로 그 산하 노회들이 환원 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에 개혁파교회 세계대회에 가입하였다가 1972년 9원 57회 총회에서 이 곳으로부터 탈퇴를 결의하였다. 합동파 교회가 다시 사당동파 와 방배동파로 다시 분열된 것은 1979년 9월 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교파들의 분립과 조직 과정을 정확 하게 말하기는 어렵다. 계보상 뚜렷한 파생 경로 없이 단독 생성된 장로교 교파들도 많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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