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대혁명과 마오쩌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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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문화대혁명과 마오쩌둥
< 목 차 >
서론 - 문화대혁명 40주년을 맞은 오늘의 중국
본론
1. 문화대혁명 전개과정 및 일지
2. 문화대혁명 시기 중국인의 세대, 계층별 행로
(1)홍위병
3. 문화대혁명이 일어난 요인
(1)사회주의 건설 그 자체의 모순
(2)베트남전쟁의 본격화
(3)마오쩌뚱의 불만
4. 마오쩌둥
(1) 마오쩌둥 사상의 형성 초기
(2) 마오쩌둥 사상의 성숙기
(3) 실천론
(4) 모순론
(5) 신민주주의론
5. 문화대혁명 그 이후
(1) 1976년 문화대혁명의 종결
(2) 문화대혁명의 상흔
(3) 문화대혁명의 평가
(4) 문화대혁명을 바라보는 중국인들의 생각
결론 - 오늘날 문화대혁명의 양분화 된 평가와 후진타오 집권 이후의 문제에 대해
‘문화대혁명’ 40년을 맞은 중국의 고민은 계속될 것
문화대혁명 40주년을 맞은 오늘의 중국
침묵으로 일관하는 중국 정부의 태도와는 달리 문화혁명은 요즘 들어 일부 민간에 의해 다시 회고되고 있다. 투쟁에 참여했던 이해 당사자들이 아직 살아 있는 가운데 논란이 제기될 경우 더 큰 혼란을 불러올 수 있다는 게 중국 정부의 계산인 듯하다. 하지만 민간을 중심으로 광기(狂氣)에 휩싸였던 당시의 의미를 되씹어 보려는 분위기는 완연하다.
문혁 40년, 중국 지도부의 생각
중국 정부는 문혁 관련 공식 행사를 전혀 마련하지 않았다. 아무런 기념식도 열리지 않는다. 신화통신 등 언론도 침묵하고 있다. 1966년 마오쩌둥(毛澤東)의 5.16 통지로 촉발된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은 10년간 수많은 희생자를 낳았다. 77년 복권돼 권력을 장악한 덩샤오핑(鄧小平)이 81년 마오에 대해 "70%의 업적과 30%의 과오(七分功 三分過)"라는 평가를 하면서 문혁에 대한 결론은 일단 마무리됐다. 이후 중국 공산당은 문혁에 대해 다시 언급하지 않는 것을 관례로 지켜오고 있다.
하지만 민간의 분위기는 다르다. 문혁을 주제로 한 음식점이 등장해 인기를 모으는가 하면, 당시 농촌운동(下放)에 동원된 청년들이 다시 모여 당시를 회고하는 일들이 이어지고 있다. 기름기 없이 잡곡만을 먹던 분위기를 흉내 낸 우구짜량(五穀雜糧) 전문 음식점이 생겨나고, 농촌으로 간 지식청년(知靑)들의 삶을 재현한 즈칭판좡(知靑飯莊)이 우후죽순처럼 대도시에 생겨나고 있다.
1. 문화대혁명의 원인과 전개과정
문화대혁명은 단순한 정치 투쟁이나 이념 논쟁 등으로 볼 수 없을 만큼 다양한 성격을 띠고 있었던, 중국 사회 전반에 걸친 대변혁이었다. 따라서 모택동이 문화대혁명을 구상하고 이를 실행하게 된 배경 역시 어느 한 가지로 제한할 수는 없으며, 1960년대 중반에 중국 사회가 떠안고 있던 여러 가지 논쟁과 모순들을 두루 살펴보아야만 한다.
먼저 정치적으로는 대약진운동의 실패 이후 등장한 유소기, 등소평 등의 당내 실권파가 여러 가지 조정정책을 시행하면서, 모택동은 자신이 정치적으로 소외당하고 있다고 느끼는 한편 이들 실권파의 정책이 수정주의적이라고 우려하게 되었다. 또한 국방, 외교적으로는 중소분쟁과 베트남 전쟁을 맞게 된 중국이 미국과 소련 중 어느 쪽과 연합하여 어느 쪽에 맞설 것인지에 대한 논쟁이 일어나기 시작하였고, 사회적으로도 당, 정, 군의 특권 계층과 일반민중, 도시민과 농민, 육체노동자와 정신노동자 등의 여러 사회적 관계에서 괴리와 불평등이 생겨났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모택동은 일반 민중들에게 각인되어 있는 자신의 권위를 최대한 이용하고 신격화하여 민중들이 적극적으로 투쟁에 나서도록 선동하였고, 이를 통해 반대파를 숙청하는 한편 자신의 이상에 맞게 중국 사회를 다시 한 번 재편하고자 하였다. 사실 이 두 가지는 밀접히 맞물려 있다. 사회주의의 발전에 장애가 되는 부르주아적 사상, 관습, 습관 등이 아직도 문화영역의 각 계층에 남아있으므로 이를 철저히 뿌리 뽑자는 것이 그의 사상인데 이는 당시 체제 아래서의 기득권층을 단죄하고 몰아낼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모택동은 많은 당 관료들이 사회주의의 구호를 외치고는 있으나‘자본주의의 길을 향하고 있다’고 단언했다. 게다가 그는 자신이 나이가 들어가고 있음을 의식했고 (당시 73세), 원로들이 자신을 배제하려 한다고 생각했다. 그를 반대하는 당 지도부가 고수하고 있던 사상과 관념에 대한 비판은 나아가 과거의 모든 유물이나 가치관을 부정하는 극단적 입장으로 흘러갔다. 모택동은 능동적 의지를 바탕으로 사회의 전반에 걸쳐 사상을 개조하고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간의 계급투쟁을 실천화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상부구조의 개혁을 위해 대중선동을 통한 아래로부터의 혁명을 시도하였다. 그리고 이와 같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그는 협력자들을 찾아서 결집시켰으니, 한 쪽은 임표가 이끄는 인민해방군이었고, 다른 한 쪽은 강청, 장춘교, 요문원등 훗날 ‘4인방’ 이라고 불리게 될 좌익 성향의 간부와 지식인들이었다. 모택동은 대약진운동의 실패가 명확해지면서 권력의 2선으로 물러나 앉은 이후로, 자신의 협력자들을 모아서 문화대혁명을 구상하고 그것을 실행에 옮길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1965년11월10일, 요문원의 논문 [신편역사극 ‘해서파관(海서破官)’]을 평하다]가 상해의 [문회보]에 발표되면서 문화대혁명 시작되었다. 이는 중국에서 흔히 ‘文攻’이라 불린다. 본격적인 정치공세에 앞서, 문장을 통한 비판을 내세워 분위기를 잡아가는 것으로, 정치투쟁의 서막이자 신호탄에 해당한다. 문공의 소재로 떠오른 [해서파관]은 당시 북경(北京)시 부시장인 오함이 1960년에 쓴 중국 전통극인 경극(京劇)의 대본으로, 그 내용은 명 가정제때의 충신 해서가 황제의 실정을 간언하는 이야기로 짜여 있다. 이 논문에서 요문원은 [해서파관]의 저자인 오함이, 황제에게 직언을 하였다가 파직당한 해서에 빗대어 팽덕회를 옹호하고 모택동을 비판하려 하였다고 비난하였던 것이다. 유소기, 등소평 등의 당내 실권파들은 이 문제를 다루기 위해 1966년 2월‘ 문혁 5인 소조’를 소집하였지만, 이들은 모택동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이 문제를 그저 학술적인 문제로서 다루고자 하였다. 이러한 반응은 모택동이 예측한 그대로였고, 그는 즉시 당내 실권파와 문혁 5인 소조를 반당파, 반혁명파, 수정주의자로 몰아세웠다. 결국 나서경, 양상곤, 팽진, 육정일 등 당군의 원로들이 숙청당하고 문혁 5인 소조는 와해되었으며, 앞으로 문혁은 진백달, 강생, 강청, 장춘교 등의 ‘중앙 문혁 소조’가 주도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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