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민중신학논쟁 [서남동 - 김형효의 논쟁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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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1970년대 민중신학논쟁
[서남동 - 김형효의 논쟁을 중심으로...]
1. 들어가며 [1970년대 시대배경과 민중신학의 태동]
1970년대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 걸쳐서 격동의 10년이었다. 정치적으로 71년 4월에는 3선 개헌에 의한 첫 선거가 실시되었고, 10월에는 서울일원에 위수령이 발동되었으며, 12월에는 국가비상사태선언이 잇따랐다. 72년 10월에는 10월 유신이 단행되었고, 74년 1월에는 긴급조치가 발표되었으며, 끝나는 79년에는 부마사건으로 부산, 마산등지에 비상계엄령이 선포되었고, 12.6사건이 발생하였다. 경제적으로는 62년부터 경제개발 5개년계획의 지속적인 추진으로 70년대에 와서 우리나라 산업구조는 근본적으로 변화하였으며 이에 따라 사회구조 사람의 의식구조가 급격히 변하였다. 동시에 이 나라 경제개발이 표면적으로는 물질적 풍요를 가져온 듯 부였지만 그 가운데 새로운 문제로 등장한 비인간화현상, 정치적 압력에 의한 생존권의 박탈, 빈익빈부익부의 문제, 물량적 가치관에 의한 부정부패 등으로 아픔과 고투(苦鬪)를 겪었다. 주재용, 한국그리스도교 신학사, 대한기독교서회, 1998 p.281
이러한 현실가운데 교회가 민중의 아픔을 외면할 수 없는것은 당연하다. 특히 1971년 청년노동자 전태일의 죽음을 계기로 민중의 고난에 찬 삶의 실상에 눈을 뜨게되었다. 전태일이 죽고 9일뒤 22일은 새문안교회(예장통합) 대학생부 신도 40여명은 전태일의 죽음에 사회가 책임이 있고 자신들도 공모자라며 속죄를 위한 금식기도회를 열었다. 23일에는 기독교계에서 개신교와 천주교의 공동 집전으로 추모예배를 거행하였는데,
故 장공 김재준목사는 “우리 기독교인들은 여기에 전태일의 죽음을 애도하기위해 모인것이 아닙니다. 한국기독교의 나태와 안일과 위선을 애도하기위해 모였습니다.” 라고 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산업선교회와 도시빈민선교회 등의 활동이 더욱 강화되었다. 한국교회가 민중의 눈을 통해 세상과 사물을 새롭게 보면서 교회의 전통과 신학도 재 조명되기에 이르렀다. 그 성과가 1970년대 중반에 이르러, ‘민중신학’ 이란 이름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권오문, 대한민국사를 바꾼 핵심논쟁 50 말말말, 삼진기획, 2004 p.261
2. 들어왔다 [“어서와 민중신학논쟁은 처음이지?” 서남동과 김형효]
민중신학이란 구체적인 신학의 화두를 처음 내놓은 사람은 서남동 교수(연세대)였다. 그는 1975년 민중의 시각에서 본 《예수 · 敎會史 · 韓國敎會》논문을 발표하였다. Ibid p.262
이 논문의 내용에서는 크게 예수, 교회사, 한국교회의 3가지 큰 틀을 두고 이야기하고 있다.
첫째로 ‘예수’에서는 민중과 예수와의 동일성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이 동일성은 무조건적인 동일화, 절대적인 동일화 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다시말해 서남동은 예수가 항상 어느때 어느 경우에도 병든자, 가난한자, 눌린자, 억울한자 였다고 말한다. 그는 부자도 권력자도 아니었으며 그들 편에 선 경우도 없다. 또한 그는 말한다. 예수는 일찍이 가난한자, 눌린자에게 기도를 가르쳐주신 바 있다. 가난자의 내일 먹을 것을 주시라고, 또 눌린자에게, 불의한자를 그 눌린자가 용서할테니 눌린자의 죄를 하나님이 용서해 주시라는 기도이다. 그런대 항상 먹을것이 풍부한 부자가 이런 기도를 흉내내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짓이다. 권력자 누르는자가 다른 사람을 누르고 서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옵소서’라고 기도하는 종교의식은 하나님을 우롱하는 짓이다. 부자와 권력자는 ‘주기도문’을 드릴 자격이 없게되어있는 것이 기독교이다. 서남동, 기독교사상, 1975년 2월 p.55
그리고 서남동은 ‘예수의 십자가를 진다’는 말에서 예수와 젤롯과의 상관관계를 이야기한다. 예수는 로마정부와도 성전종교와도 흥미가 없었던 예언가의 계보에 속한다. 예수는 바리세파도 아니었고 사두개파도 아니었으며 에세네파와도 일치하지 않았다. 물론 예수와 젤롯당과 어떤 관계가 있었느냐는 물음에는 선명한 대답이 나오기 어렵다. 하지만 적어도 로마의 관리들은 예수를 젤롯당으로 몰아부칠 수가 있었고 분명히 예수는 가난하고 눌린자의 편에 섰고 또 예수가 ‘제자의 집단’이라는 조직을 가진것은 분명하다고 말한다.
마지막으로 서남동은 예수에 대하여 종교사적인 각도에서만 볼 것이 아니라 사회 정치적인 각도에서도 보아야한다고 말한다.
둘째로 ‘교회사’ 에서는 예수는 무조건 가난한자 눌린자 당시 로마의 식민지인 유대땅의 암하레츠를 본인과 동일화 시킴으로서 다음 시대에 교회와 교회사 규범에 하나로 볼 수 있다. 이들이 본 역사적 전망은 어떠한 것일까? 그것은 절망이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의 급박한 도래” 역사의 묵시록적 종말을 내다보았다. 묵시록적 종말은 가난한자, 눌린자, 서민대중 종교였다. 예수는 이 민중의 소리를 외친 것 즉,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이다. 예수는 그 왕국을 위해 십자가를 졌으며 예수의 십자가 이후에 신국도래의 기다림은 예수의 재림으로 표현한다. 그러나 복음이 가지고있는 교회적 극명적 잠재력은 제도적 교회억압아래 질식된 채로 있었다. 하지만 그날의 신국주의의 움직임이 동트기 시작하면서 가난한자, 눌린자들의 기다림 속에서 복음의 언어는 결국 그들이 누릴 수 있는 신국을 나타내는 것이다라고 서남동은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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