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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작품을 선택한 이유
내 인생의 영화 한 편을 꼽으라면 항상 꼽는 영화가 바로 이 영화다. 고3 수능 시험을 마치고 이 영화를 처음 접했는데, 그땐 정말 10분도 채 되지 않아 골아 떨어졌다. 대학에 입학한 이후, 다시금 이 영화를 볼 기회가 생겼다. 당시, 서강대 앞에는 경영학과 89학번 선배가 운영하는 지하 영화 바(영화를 보면서 술도 마시는)가 있었다. 다시금 접한 이 영화는 내게 아주 강렬하게 다가왔다. 대사 한 마디 한 마디가 가슴에 파고들었다. 대사 한 마디 한 마디가 내게 시 구절이나 잠언처럼 다가왔다.
당시 내가 처한 상황도 이 영화에 빠져드는 데 한 몫 했을 것이다. 당시 난 같은 과 동기를 아주 깊이 짝사랑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내가 아닌 나보다 나이 많은 선배와 사귀고 있었다. 그런 상황 때문에 내가 구양봉에게 감정이입을 깊이 하게 된 것 같다. 내가 사랑하는 여자가 다른 남자와 사귀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는 건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 당시, 난 취생몽사 같은 걸 간절히 원했다. 모든 걸 잊어버리고 싶었으니까. 하지만 잊으려하면 할수록 더 기억이 남는다는 자애인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럴수록 그녀를 향한 내 사랑은 더욱 강렬해지기만 했으니까. 8개월간을 깊이 사랑한 끝에 마침내 그녀와 사귀게 되었지만, 현재 그녀는 다른 남자의 아이를 가진 아기 엄마가 돼 버렸다. 이번 과제를 위해 이 작품을 다시 보았을 때도 여전히 그녀가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인가보다.
이 영화는 어찌 보면 반전영화이기도 하다. 영화 마지막 부분에 등장하는 자애인과 황약사의 대화는 어찌 보면 반전이다. 중요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마지막에야 등장하는 자애인(장만옥 분)의 대화에서 그녀가 얼마나 구양봉을 사랑하고 있는지 드러난다. 하지만 구양봉은 그런 사실을 전혀 모른 채, 그녀가 자신의 형과 결혼한 남이라는 사실만 인지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갈 뿐이다. 더욱 안타까운 점은 바로 황약사가 얼마든지 구양봉과 자애인의 마음을 알려줄 수 있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황약사 역시 자애인을 사랑했기에, 그리고 자애인이 그렇게도 사랑하는 구양봉을 질투했기에 서로의 마음을 전하지 않았음을 알게 되는데, 이 부분이야말로 정말 안타까운 부분이다.
이 영화가 좋은 또 다른 이유는 바로 영화 중간에 아무렇지도 않게 등장하는 소품과 말 한마디가 나중에 엄청난 복선으로 작용한다는 점이다. 영화 첫 장면에 나오는 구양봉은 황약사가 거만한 사람이라서 질투심이 없는 줄 알았다고 말하는데, 알고 보면 황약사야말로 이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 중 가장 질투심이 강한 인물이다. 그리고 영화에 등장하는 취생몽사, 새장, 손수건, 복사꽃 등은 나중에 등장인물간의 관계나 사연을 알려주는 중요한 기제로 작동하는 점 등도 흥미롭다.
- 내러티브의 기본적 성격
이 작품의 내러티브는 기본적으로 대안적 시나리오의 범주에 속한다. 특별한 기-승-전-결의 구조가 아닌, 등장인물 중심으로 이야기를 펼쳐나간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중요 인물은 총 8명. 남자 넷, 여자 넷인데, 각 등장인물을 잘 살펴보면 남자 넷의 캐릭터와 여자 넷의 캐릭터는 모두 비슷하다. 물론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한 남자와 한 여자의 분신이라는 느낌이 더 강하게 든다. 고전적 시나리오에 등장하는 인물들처럼 뚜렷한 캐릭터가 이야기를 이끌기보다는 각각의 에피소드에서 순간적으로 드러나는 인물들의 감정과 정서가 더욱 강하게 이야기를 끌고 나간다. 기-승-전-결이 뚜렷하진 않지만, 작품이 진행되며 이야기의 사연이 퍼즐처럼 맞아가는 부분은 이번 학기에 살펴본 홍상수의 을 닮았다. 비슷한 구조의 에피소드가 반복되는 점도 과 흡사하다.
그래서 이 작품의 내러티브를 기-승-전-결의 플롯으로 나누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게 구분하기엔 애매하다. 그저 등장하는 중심인물 중심으로 에피소드를 나누는 것만이 가능할 뿐이다. 이 영화는 전반적으로 구양봉과 자애인의 사랑 이야기가 중심축이지만, 세부적으로는 황약사-모룡연(언)-맹무살수-홍칠-자애인의 이야기로 구성돼 있다.
중심 갈등도 애매하다. 어떤 특정한 주인공의 중심 갈등이 등장하고 그것을 해결하는 내용이 아니라, 각각의 등장인물들의 정서와 감정만이 드러날 뿐이다.
- 작품의 중심 소재
이 작품은 언뜻 보기에 무협영화처럼 보이지만 알고 보면 슬픈 사랑 이야기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즉, 불가능한 사랑에 대한 이야기다. 이 영화에는 다양한 등장인물들이 등장하는데, 이들은 하나같이 사랑의 상처를 지니고 있다. 오직 홍칠만이 그런 사랑의 상처를 입지 않고 자신의 부인과 함께 길을 떠나는데, 오직 그만이 이 영화에서 희망의 상징으로 나타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