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연구주요저작강독 - 북조선사회주의체제성립사 1945~1961, 서동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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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북조선사회주의체제성립사 1945~1961
서동만
이 책은 기존 연구에 대한 반성을 통해 북조선사회주의를 변화의 측면에서 규정하고, 북조선 사회의 근저에 있는 국가사회주의체제를 북조선체제론의 기초에 두는 것을 기본시각으로 하였다. 구체적으로는 1945년부터 61년에 걸쳐, 북조선 사회주의의 제도적 형성과정을 몇 개의 부문별로 역사적으로 추적하였다. 저자는 북조선 사회주의체제가 1961년 제4차 당 대회를 전후하여 확립되었다고 본다고 밝혔다. 1945년부터 61년을 전후로 한 시기까지의 전 기간에 걸쳐 사회주의체제의 성립과정을 몇 개의 단계로 나누어 각 단계를 그 제도적 형성의 측면에서 취급하였다. 각 단계마다 권력중심부의 정치구조 이외에, 군사부문, 공장, 농촌의 통치 구조를 분석, 종합함과 동시에 전 기간에 걸쳐서 체제의 형성과정을 각 부문별로도 정리하였다.
이 책은 1945년부터 1961-62년까지 기간을 다섯 시기로 나누어 단계적으로 파악하면서, 동시에 매 단계를 부문별로 나눠 서술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었다. 정치적 세력관계의 변화과정을 기본 축으로 하면서, 당과 정부의 관계, 당과 군대의 관계, 공업부문의 관리체제, 농업부문의 농업생산체제 및 농촌지역의 통치체제 등 네 개 부문으로 나눠 분석한다.
제1장에서는 해방과 인민위원회라는 제목으로 해방 직후인 1945년부터 1946년까지의 시기에 일어난 일을 다루고 있다. 이 장에서는 해방직후 북조선에 일어난 변화에 대하여 다루고 있다. 이 다양한 변화는 초기에 생겨난 다양한 단체들에 대한 설명을 포함하고 있다. 일제 식민지로부터의 해방 이후 한반도의 전 지역에는 커다란 공권력의 공백상태를 가져왔다. 미소 양군이 진주하기 이전에 그 공백을 메운 것은 각 지역에서 밑으로부터 자연발생적으로 만들어진 자치조직이었다. 이들은 주로 치안 확보와 일본인재산 접수를 활동 목표로 두었다. 이 자치조직이 생겨난 이후에 미소 양군이 남북조선에 진주하게 되었고, 남북조선의 정치지형은 미소 양군 점령정책의 규정을 받아 크게 변해 간다. 북조선 점령에 따른 소련군최고사령부의 7개 항목 지시 중, 첫째는 북조선 영토 내에 소비에트 및 그 밖의 소비에트정권의 기관을 수립하지 않고, 또한 소비에트 질서를 도입하지 않을 것과, 둘째 북조선에 반일적인 민주주의정당, 단체가 광범한 연합에 기초를 둔 부르조아민주주의정권을 확립할 것과, 셋째, 적군이 점령한 조선 각지역에 반일적인 민주주의 단체, 정당이 형성되는 것을 방해하지 않고 원조할 것과, 일곱째 북조선의 민간행정의 지휘는 연해주군관할구역군사평의회가 수행할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1945년 10월 8~10일 평야에서 치스챠코프의 제안으로 열린 5도인민위원회연합회의가 열렸고, 이 회의를 전후하여 북조선 지역의 방향을 좌우하는 중대한 회합이 진행되었다. 북조선 지역에 정권의 기초를 만든다는 정책이 결정된 이상, 그 작업의 일환으로 북조선 지역 독자의 당조직을 형성하도록 조건을 조성하는 것은 소련군이 당면한 가장 중요한 정책이었다. 당시 소련은 북조선 지역 독자의 공산당조직을 만들어야 한다고 판단하고, 서울의 당과 관계없이 북조선에 공산당의 남북분립이라는 형태로 만들어져야한다고 판단하였고, 10월 13일 서북5도당책임자 및 열성자대회에서 조선공산당 북부조선분국이 공식적으로 결성되었다. 대회에서는 “정치노선 확립 조직확대 강화에 관한 결정서”가 채택되었다. 결정서는 조선해방의 두 개의 특수성을 지적하면서 동시에 기본과업은 토지문제라고 규정하였다. 다만 외래의 힘에 의해서 민족해방은 획득하였지만, 통일한 주권은 아직 수립되어 있지 않다며, 통일된 조선인민공화국을 수립함으로써만 우리들의 과업을 해결할 수가 있다고 밝혔다.
11월 19일에는 북조선5도행정국이 발족하여 10개의 국이 조직되었고, 이 중 공산주의자가 5국의 반을 점하고 있는 사태였다. 11월 20일~25일 서울에서 전국인민위원회대표자대회가 열렸다. 이 대회는 선언 수준에 머물러 있던 조선인민공화국이 전국적 차원에서 지방인민위원회를 통할하는 통일적 조직체로 인정될지 어떨지를 확인하는 의미르 가지고 있었다.
12월 초에는 소련에서 당, 행정 관계 전문가인 허가이를 포함한 조선인 그룹이 추가로 북조선에 도착하였다. 당시 소작료 3.7제 투쟁으로 인한 시위가 끊임없이 일어났고, 그 중 신의주사건은 북조선 정세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이 당시 공산당의 당세나 내부 상태를 보면, 기본적으로 각 도,시,군에 당위원회가 조직되어 있었지만, 공장이나 제조소 및 농촌의 면에는 세포가 조직되어 있지 않았다. 정확한 당원통계도 갖추어져 있지 않았다. 지방당조직의 자율성도 강하였다. 이러한 분국의 상태는 공산당의 도, 군, 면인민위원회에 대한 영향력이 약한 것, 공산당조직이 노동조합을 충분히통제할 수 없는 것, 기타 정당이나 사회단체와의 통일전선사업에서 문제가 생기고 잇는 것 등 여러 가지에 그 원인이 있다고 간주하고 있다.
북조선 지역은 풍부한 지하자원과 수력자원 등 자연적 조건이 좋았기 때문에 1930년대 일제에 의해 중화학공업기지로 집중적으로 개발되어 왔다. 해방 직후 공업지대의 공장운영은 소련군과 각 지역 인민위원회의 중요한 관심사였다. 그리고 각 지역에서는 공장위원회가 생겼다. 소련군은 일본인재산을 ‘적산’이라고 규정해 법적으로 접수하는 후속조치를 취하고, 실제의 관리권한은 인민위원회에 위임하였다. 또한 해방 후 전국 각지에서 자연발생적으로 노동조합의 조직이 추진되었다.
한편, 1945년의 큰 문제 중 하나로 식량공급의 어려움이 있었다. 북조선의 식량사정은 급속도로 악화되고 있었으며, 남조선 역시 식량부족 사태에 직면하면서 한반도가 식량문제를 놓고 골머리를 썩히고 있었다. 특히 북조선의 경우 점령 소련군이 주둔지인 각도에서 자체적으로 식량조달을 하고 있었던 것이 크게 작요하였다. 식량 문제를 해결하려 미국과 소련은 협상을 하였으나, 소련군이 미국 측이 식량 제공을 할 여유가 없음을 알게 되자 미국과의 협상을 중단하였다. 북조선5도행정국이 만주 지역에서 식량을 구입하기 시작함에 따라 남북 간 식량을 통한 경제적 연계는 단절되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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