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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대몽항쟁과 삼별초의 난
서론
고려는 정변으로 거듭 속앓이를 하면서, 조야는 무신을 천대하고 문신만을 중시하는 그릇된 풍토로 일그러지고 있었다. 고려무신들은 권위와 체통이 땅으로 곤두박질치는 현실에 격분하여, 마침내 반란의 칼날을 뽑아 고려사회를 뒤흔들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무신들의 입김은 거세졌고, 문신들은 도리어 숨을 죽이며 하루하루를 겨우 연명하는 신세로 전락했다. 한때 무심코 자행했던 오만방자한 망동의 대가를 철저히 되갚음당한 꼴이었다.
그러나 무신들은 강화된 자신들의 권위와 위신을 건실한 국방력 강화로 승화시키지 못했다. 오히려 또 다른 족벌체제를 일궈 고려사회는 부패와 부정으로 더욱 혼탁해졌다. 따라서 각처에서 민중봉기가 발생하고 생산력이 격감하는 등 심각한 상황이 거듭됐다.
이렇게 나라 안에서는 무신정변이 일어나 혼란에 휩싸이고 있을 당시 나라 밖에서는 몽골고원의 부족장 테무친이 몽골족 전체를 통일하고 칸의 자리에 추대되었다(1206년). 그리고는 중앙아시아를 중심으로 한 세계제국건설에 나섰다. 1211년부터 중원을 장악하고 있던 금을 공략했고, 1220년 터키계의 화레즘 샤 제국을 쓰러뜨렸다. 1255년에는 남러시아를, 1227년에는 동의 서하를 멸망시켜 중앙아시아를 완전히 몽골제국의 지배하에 두었다. 이러한 몽골제국의 팽창은 한반도에 까지 영향을 미치기에 이르렀다.
북방의 거란유민들은 몽골군의 추격을 피해 고려에 들어오게 되었다. 이 북방에 들어온 거란유민들은 약탈과 살인, 방화를 자행함으로써 고려의 골칫거리였고, 진압을 위해 고려는 김취려 노원순 장군등을 파견했지만 진압은 여의치 않았다. 결국 고려는 몽골군과 연합하여 거란을 완전히 격퇴하였다. 이에 따라 몽골과 형제의 맹약을 맺었고 고려는 매년 엄청난 양의 공물을 바쳐야 했다. 그러던 중 몽고에 침략의 빌미를 제공하는 사건이 일어나고 말았다. 해마다 고려에 와서 공물을 거두어 가던 몽골의 사신인 저고여일행이 압록강가에서 피살된 것이다(1225). 고려는 피살사건이 도적떼의 소행이라고 했지만 몽골은 고려를 의심했다. 이로써 몽골의 침략은 시작되었다.
본론
30년에 걸친 대몽항쟁
칭기즈칸에 이어 즉위한 태종 오고타이는 1231년에 6년전에 있었던 저고여피살사건을 문책한다는 구실로 고려를 침략했다. 몽골의 1차 침입이었다. 고려의 장수 김경손과 박서는 강감찬의 귀주대첩으로 유명한 이곳에서 막강한 몽골군과 결사 항전하여 끝내 성을 지켜냈다. 그러나 다른 지역의 전투는 계속되는 패전이었다. 몽골군은 개경문 밖까지 진격해 항복을 강요했다. 그러나 집권자 최이는 사병을 시켜 자신의 집과 목숨을 지키는데만 관심이 있었을 뿐이었고 결국 고려는 몽골 장수들에게 엄청난 양의 물품을 선물하고 투항했다. 고려의 항복을 받아낸 몽골은 개경을 비롯한 40여 성에 72명의 다루가치를 두어 그 지방의 행정을 실제로 관할하게 하였고 몽골군은 군사를 거두어 돌아갔다.
고려는 주둔한 다루가치의 횡포와 막대한 양의 공물을 요구하여 이에 대한 대책을 마련해야했고, 집권자 최이는 몽골의 지배와 다루가치의 권한이 커지면 정권유지에 위협이 됨을 느끼고 강화도 천도를 주장하였다. 강화도로의 천도는 집권자들에게는 호화로운 생활을 계속되게 해주었지만 백성들은 전쟁의 참화속에서 죽음과 포로가 되어 종으로 끌려가는 고통을 겪어야 했다.
고려 조정이 강화천도를 단행하자 몽골은 이를 선전포고로 받아들여 회군한지 7.8개월 만인 1232년에 2차 침략을 강행하였다. 몽골군은 고려정부와 고종의 개성환도를 촉구하다가 고려가 이에 응하지 않자 개경을 거쳐 남하를 계속하였다. 이때의 침략으로 고려의 보물인 《고려초조대장경》경판이 모두 불타 소실되었다. 한편 본대의 살리타이는 처인성을 공격하다 승려 김윤후와 처인부곡민의 화살에 맞아 죽어 몽골군은 북으로 철수하였다.
동진평정과 금나라 평정을 위해 침입을 잠시 멈췄던 몽골은 1235년 탕구를 사령관으로 침략해왔다. 탕구는 고려조정과는 아무 교섭없이 닥치는 대로 전국토를 유린하였으며 이때 황룡사 9층목탑이 파괴됐다. 몽골군은 4년에 걸쳐 약탈 살해 등을 자행했으며, 많은 민중을 포로로 잡아갔다. 이 3차 침입은 1238년에 몽골이 고종에게 친조를 촉구하며 물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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