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과학 4 19민주항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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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사회과학 4 19민주항쟁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419민중항쟁
目次
1. 명칭의 규정
2.. 419민중항쟁의 배경
1) 이승만 정권의 권력 기반
2) 1950년 말의 상황
3. 419민중항쟁의 전개과정
4. 419민중항쟁의 의의와 한계
1) 419민중항쟁의 의의
2) 419민중항쟁의 한계
1. 명칭의 규정
1960년 4월의 혁명을 각자의 위치에 따라 ‘419 혁명’, ‘419 민중항쟁’, ‘419 의거’ 등 다양하게 부르고 있다. ‘혁명’과 ‘민중항쟁’을 나누는 기준으로 삼는 것은 주로 운동의 주체주도세력과 ‘419’의 역사적 성격을 어떻게 보느냐이다. ‘419’에 대한 일상적 호칭인 ‘4월혁명’은 엄밀한 사회과학적 의미에서의 성격규정보다는 학생시민의 힘에 의해 정권교체를 이룩한 점을 높이 평가하려는 뜻이 담겨 있다. 이러한 규정은 반독재투쟁의 연장선에서 학생중심의 민주화운동에 큰 의미를 부여하는 것으로 1970년대까지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유신체제와 1980년의 광주민주화운동을 거치면서 ‘419’에 대해서도 재평가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즉 1980년대에 이루어진 민중역량의 성장과 새로운 역사의식의 형성에 따라 운동의 주체세력을 학생에서 민중중심으로, 운동의 성격을 민주화에서 민족민중운동으로 새롭게 조명하기 시작하면서 ‘민중항쟁’이라는 용어가 등장하였다.
연구사에 반영된 명칭을 둘러싼 논쟁은 419 당시부터 제기되었던 문제로 단순하게 관점의 차이를 반영한 것이라고만은 할 수 없다. 오히려 여기에는 419에 대한 연구의 심화와 인식의 확대가 일정하게 반영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민중항쟁’적 관점에서는 419를 315 부정선거에서 이승만 하야에 이르는 일련의 학생시민봉기에 한정하지 않고, 이승만 정권의 구조적 위기에서부터 516에 의해 4월혁명의 정신이 좌절되고, 왜곡되기까지의 일련의 학생민중운동을 분석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이것은 419에 대한 인식의 범위를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크게 확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 419 민중항쟁의 배경
1) 이승만 정권의 권력 기반
이승만의 정권의 권력 기반은 반공반일 이데올로기, 경찰군부청년단체, 자유당으로 볼 수 있다.이승만 정권에서 반공 이데올로기는 민중적 조직기반의 결여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자기이익을 관철하기 위해 정당화한 논리이다. 이승만 정권은 이를 적극 수용함으로써 국가형성과정에서 주도적 위치를 점하게 되었다. 또한 미국이 남한에서 추구하고자 했던 이해관계, 이승만과 한민당 극우세력의 이해관계, 민중이 수동적으로 동조하는 상황 아래 가능했던 단독정부 수립에 있어서 그 세 부분의 연결을 정당화시켜준 논리 또한 반공 이데올로기이다. 즉, 반공 이데올로기는 남한에서 미국의 이익실현과 외세 의존적인 이승만 정권의 자의적인 권력행사를 정당화시켜주는 역할을 하였다.
이승만은 적극적인 항일태도와 반일 이데올로기를 이용하여 민중들의 반일적 감정을 정권유지의 도구로써 이용하고자 하였다. 반일 이데올로기는 반공 이데올로기를 보완하는 사회적 통합의 기능을 수행함으로써 정권유지의 도구로 이용되었다. 이승만의 반일이 진정한 반일이 아니었음은 그가 재임 기간 중 한일회담을 진행시키고 있었던 점과 그의 지지 세력이 친일파로 구성되어 있었던 점을 지적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증명될 것이다. 이승만의 핵심 세력이 친일경력의 관료, 경찰, 군부였다는 점에서 반민특위활동의 와해는 필연적인 귀결이었다. 이승만의 집권 시기에 한일회담이 잘 진행되지 못했던 것은 민중의 강력한 반대 때문이며 부분적으로는 한일간의 이해가 상충되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이승만 정권의 권력기반으로 들 수 있는 것은 경찰과 군부, 청년단체이다. 이들 단체는 이승만이 폭력적으로 남한을 장악해 나가는 과정에서 최대의 그리고 실질적인 물적 기반이 되었다. 이승만은 대중적인 지지와 합의에 기초하여 정권을 유지할 수 없었으므로 제도화된 물리적 강제력을 가진 이들 단체를 동원하여 강압에 의한 지배를 펴나갔다.
경찰은 이승만 정권의 체제 유지에 핵심적인 골간이었다. 보통의 국민국가에서 경찰은 법과 질서를 유지하는 객관적인 사회 장치로 이해되지만 당시 대한민국 경찰은 이승만 정권에 반하는 세력들을 정치권력으로부터 거세하고, 대신 이승만을 위시한 단정세력이 정치권력을 장악하여 초기의 국가형성을 주도할 수 있도록 만든 지극히 정치 세력화된 조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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