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성공회와 교회와 국가관계

 1  영국 성공회와 교회와 국가관계-1
 2  영국 성공회와 교회와 국가관계-2
 3  영국 성공회와 교회와 국가관계-3
 4  영국 성공회와 교회와 국가관계-4
 5  영국 성공회와 교회와 국가관계-5
 6  영국 성공회와 교회와 국가관계-6
 7  영국 성공회와 교회와 국가관계-7
※ 미리보기 이미지는 최대 20페이지까지만 지원합니다.
  • 분야
  • 등록일
  • 페이지/형식
  • 구매가격
  • 적립금
자료 다운로드  네이버 로그인
소개글
영국 성공회와 교회와 국가관계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영국 성공회와 교회와 국가관계”
서론
“유럽의 종교개혁은 교회와의 투쟁에서 세속 권위의 결정적 승리였으며, 세속 주권국가들로 해체된 과정의 일부였다” T.M.Parker, Christianty and the State in the Light of History (London:ACB,1955),61;김흥수, “敎會와 國家 關係의 歷史的 類型,” 신학사상 59집 (1987), 825재인용.
는 제롬 커윈의 언급처럼, 15세기 이후로 유럽의 교회와 국가관계에서 국가의 권위가 강화되었다. 특히 종교개혁 이후 영국교회는 국가(왕권)이익에 종속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로마카톨릭 교황과 분리,단절에서부터, 국교회의 수장이 된 국왕과 국교회로 성립된 성공회는 새로운 관계를 형성해야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이 상황에서 영국의 의회는 이 두 관계에 큰 영향을 끼쳤고, 결정적인 시기에는 ‘의회안의 왕’과 ‘의회안의 국교’가 되기까지 의회의 권한을 키웠었다. 또한 성공회가 국교회로 되면서, 영국의 개혁세력은 국교회 안과 밖으로 분화되어 교회와 국가관계를 복잡하게 만들었고, 결과적으로 국교회 밖의 청교도는 의회를 통해서 신앙의 자유를 성취하게 되었다. 본 발제는 이런 면에 관심을 갖고 영국 성공회 성립이후부터 ‘권리장전’을 승인한 윌리엄3세까지 영국성공회의 교회와 국가관계를 다루고자 한다.
1. 영국 성공회와 국가(의회)관계
서양 봉건적 정치제도가 무너지고 중앙집권적 국민국가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영국 군주는 의회와 보통법을 존속시키면서 왕권을 지탱하였고, 이런 전통적 계승이 영국왕조로 하여금 과거와의 단절이 아닌 역사적 제도를 수용케 하여 입헌적 의회정치의 기초를 만들게 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런 배경에서 영국 왕조는 의회가 자신의 정치적 기반이면서도 왕권의 견제세력이었다. 조세와 재정사용에 대한 법적권한을 소유한 의회와 왕의 관계는 협력하거나 갈등관계로 나갈 여지를 가졌다. 튜더왕조 시대는 능란한 정치적 처세로 의회를 장악하여 의회가 왕실에 위협이 되지 못했다. 그리고 이시기에 튜더왕조는 로마교황과 단절로 인해 생겨난 막대한 재산을 자신의 지지기반(귀족, 상공젠트리)을 다지는데 활용하였다. 그러나 스튜어트 시대에 이르면서 스튜어트 왕조 제임스1세와 찰스1세는 의회와 마찰을 빚었지만 결과적으로 시민세력으로 성장한 의회의 독자성이 더 강해져갔다.
이런 정치구조에서 로마교황과 분리, 단절했던 왕과 국교회는 새로운 관계를 형성해야했다. 국교회로 성립한 성공회는 왕과 의회라는 두 정치적 역학관계 안에서 상호관계를 맺으며 한편 신앙의 자유를 누리며 또 한편 신앙의 제한을 받았다. 그런 의미에서 요크의 대주교 갈베트는 자신의 저서 ‘영국의 교회와 국가’에서 “영국교회는 완전한 자유를 한 번도 갖지 못했다. 중세기는 교황에 의해서 지배되었고, 그 후에는 왕에 의해서 지배되었고 그리고 지금은 의회에 의해서 지배되고 있다” C.Garbett, Church and State in England,1950,63;이종성,『교회론2』(서울: 대한기독교출판사, 1989),297.
라고 말했다. 엘리자베스 여왕과 의회는 ‘통일령’을 법적으로 통과시켜 국교에 복종하도록 만들었고 교회정치(제도)면에서는 감독제를 선호했다. 국가가 ‘하나의 신앙’으로 복종을 요구하기에 이르자 그것을 불완전하게 여긴 영국 프로테스탄트들 특히, 청교도는 국교회 안과 밖에서 다양하게 개혁신앙을 요구하고 실천하였다. 교회정치(제도)문제에서 왕실이 감독제를 선호한 것은 왕이 대주교를 임명하여 교구를 통솔하기에 편리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하나의 국교회를 유지하는 방편으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일부 청교도들이 스코틀랜드의 개혁교회를 경험하고서 장로제를 요구하자 왕들은 그들에게 상당한 핍박을 가했다. 제임스1세를 비롯하여 대부분 영국 왕들은 감독제를 선호했다. 영국성공회와 국가의 관계에서 이 교회제도의 문제는 하나의 중요한 이슈가 되었다. 권태경, “영국 혁명기의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의 교회 관계에 대한 논쟁” 신학지남 (2001겨울호),401.
스튜어트 왕조에 이르러 의회의 권한이 커지고 그 의회 안에 장로교신앙을 가진 자가 다수가 되자 장로제를 선호하는 의원들은 그 제도를 도입하려했다. 케니스 래토래트, 윤두혁 역,『기독교회사』中, (서울:생명의말씀사,1997),453;장로제도에 강한 성향을 가진 청교도들은 일정지역에서 장로를 임명하고 노회(장로감독회 Classis, presbytery)를 조직하기도 했었다.
이후 전개되는 영국의 교회와 국가관계 문제는 비국교도를 중심으로 고찰하고, 본장에서는 두 번의 명예혁명과정을 통해서 만들어진 ‘권리청원’과 ‘권리장전’ 이후의 교회와 국가관계를 소개하고자 한다. 앞선 언급한 갈베트의 글을 통해서 두 관계를 소개하면, C.Garbett, Church and State in England,1950,p.148f;이종성, 교회론2 (서울:대한기독교출판사,1989),P.298.
국가는 교회에 대해서,(1)주교와 그의 교회의 모든 교직을 여왕이 선임한다.(2)성직자는 취임 전 왕에게 충성할 것을 서약한다.(3)국회의 허락 없이 공적예배와 교리를 변경할 수 없다.(4)교직자회의는 왕의 영장이 있어야한다.(5)국가가 교회의 재산과 행정을 간섭한다. 교회는 국가에 대해, (1)교회재판권이 국가에 의해서 인정된다.(2)연간 수백만 파운드의 재산이득을 받는다.(3)국가정치에 관여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영국 성공회는 국가의 보호를 받는 대신 간섭을 받고 있다. 최근 영국 국교회가 ‘기도서’ 개정문제로 세 차례 이종성,297;국교회는 기도서 개정문제로 1927년, 1928년, 1949년에 걸쳐 스코틀랜드 장로교회가 가진 정도의 지유를 요구하였으나 의회는 그것들을 부결하였다.
에 걸쳐 의회에 제기했으나 부결되었다.
오늘 본 자료
더보기
  • 오늘 본 자료가 없습니다.
해당 정보 및 게시물의 저작권과 기타 법적 책임은 자료 등록자에게 있습니다. 위 정보 및 게시물 내용의 불법적 이용,무단 전재·배포는 금지되어 있습니다. 저작권침해, 명예훼손 등 분쟁요소 발견 시 고객센터에 신고해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