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겪은 남자들만의 공간 군대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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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내가 겪은 남자들만의 공간 군대이야기
내가 입대를 한 것은 20○○년 1월이었다. 당시 나로선 대학에 와서 처음 사귄 여자 친구와 헤어져 많이 힘들어 하고 있을 때였다. 물론 헤어진지는 꽤 되는 시기였고, 입대는 이미 예정되어 있었으니 남들처럼 연인과 헤어지고 군대갔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군대는 나에게 새로운 에너지를 얻을 수 있는 도피처처럼 느껴졌다. 사실 대학교에 들어오고 나서 뚜렷한 목표의식 없이 그냥 시간만 낭비하고 있던 그 시절 나에게 입대는 새로운 출발을 위한 전환점이 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하지만 나 역시 입대 당시에는 군대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과 당시에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잃을 것만 같은 느낌에 두려워하며 입대했던 것 같다. 모든 것을 잃을 것만 같은 막연한 두려움에는 아마도 자유를 잃는다는 것과 함께 남자들만의 세계로 들어가야 한다는 두려움도 포함되어 있었던 것 같다. 가정에서도 학교에 들어가서도 한번도 남자들만이 있는 사회에는 가 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군대라는 곳이 남자들만이 득실대는 곳으로 두려움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했다. 낯선 남자들만이 있는 군대에 막상 가려하니 가장 힘든 것은 따뜻한 어머니의 품을 떠나야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입대 하던 해 겨울은 더 춥게 느껴졌던 것 같다. 그리고 입대하던 순간에서야 지금까지 내가 있던 곳이 학교도, 사회도 아닌 어머니 품이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던 것 같다. 다 큰 어른 흉내를 내며 살아온 나에게 그런 깨달음은 신선한 충격이었고 내게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 입대하던 순간 나를 보내고 멀어져 가는 어머니의 붉어진 눈시울은 평생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군대를 다녀온 남자라면 누구나 공통적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일지 모르지만 나에겐 좀더 다른 의미가 있는 순간이었다. 아마도 그 순간 이후로 나와 어머니 사이에는 말하지 않지만 둘만의 공감이 생겼던 것 같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어머니의 품을 떠나 남자들만의 세계로 들어가는 순간이 나에겐 그동안 깨닫지 못했던 어머니와 나의 관계의 의미를 깨닫게 된 순간이었다. 사실 고등학교 때와 대학교 때 늘 잔소리를 하시던 어머니와 나는 많이 다퉜고 어머니 속을 많이 썩였었다. 하지만 군대를 다녀오고 난 후에는 어머니와 나는 싸울 수조차 없는 사이가 되어버렸다.
두려움을 안고 간 훈련소의 생활은 견딜 만 했던 것 같다. 내가 가게 된 훈련소가 창원에 있는 사단의 신병교육대라서 1월임에도 불구하고 서울과는 다르게 낮이면 봄날처럼 따뜻했다. 또 같은 중대 훈련병이 모두 서울출신이라서 이질감도 없었고, 훈련이 끝난 후면 모두 친구처럼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사실 자대와는 다르게 모두가 평등한 훈련소의 내무 생활은 참으로 편안한 것이었고 그래서 아마도 내가 자대에 가서 적응하기 힘들었던 것 같다. 훈련은 그렇게 힘든 것은 아니었다. 집단으로 통제받는 것이 한편으론 아무 생각을 안해도 되니 편하다는 생각까지 할 정도로 집단생활에 적응하고 있었다. 훈련병들은 마치 학교에 처음 입학한 어린아이 같았다. 모두 20살 이상 나이를 먹은 장정들이었지만 훈련병 옷을 입혀놓으면 왜 그렇게 다 바보스러워 보이는지 지금도 나는 모르겠다. 아마도 빡빡 깎인 머리와 훈련소에서 지급받은 줄 안 잡힌 전투복과 챙이 빳빳한 전투모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가끔 사회에서 찍은 사진을 보여주는 동기가 있으면 전투복 입은 모습과 너무나 달라 놀랐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훈련소에서는 모두가 어색했고 모두가 스스로를 바보같게만 느끼는 훈련병이 되었다.
그런 훈련병들에게 훈련소에서의 조교는 훈련병을 통제하는 사람이라는 의미 이상이었다. 내 기억에 훈련소의 조교는 말 그대로 ‘멋진 남자’였고 바보스럽게 보이는 훈련소 지급용 전투모를 쓴 어리버리 훈련병이 닮고 싶은 ‘멋진 군인’의 모습이었다. 조교는 훈련병에게 마음대로 얼차려를 줄 수 있는 권력자일 뿐 아니라 모두의 모범이 되는 ‘군인상’이었고 더 나아가 멋있는 ‘남성상’을 제시하는 것 같았다. 훈련병들은 조교들이 전투복을 입는 모양새나 군인 특유의 말투를 닮고 싶어 했다. 훈련 시 잘 갖춘 모습뿐 아니라 조교들끼리 있을 때의 흐트러진 모습이나 휴식 시간 때의 농담과 같이 여유있는 모습도 부러웠다. 실제로 조교들의 멋진 모습에 훈련소에 남아 조교요원으로 뽑히길 바라는 훈련병도 많이 있었다. 훈련병들 사이에선 조교를 뽑히려면 키나 외모에서 상대를 압도할만한 카리스마가 있어야한다느니, 안경을 써서는 안되느니 하는 이야기를 많이 했던 기억이 난다. 지금 생각하면 훈련소의 조교와 훈련병의 관계는 참으로 독특한 것이었다. 그것은 단순히 계급장이 있는 기간병과 계급장조차 없는 훈련병 사이의 차이 때문이었는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여자 없는 남자들만의 공간에서 멋진 남자와 그렇지 못한 남자들 사이의 새로운 계급의 서열이었다. 조교들은 단순히 그 직책만으로 훈련병을 압도하고 통제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리더쉽과 군인다운 외모로 훈련병들을 압도했다. 그들은 직업군인이나 장교가 아니라는 점에서 교관이나 중대장과는 또 다른 존재였다. 그들은 2년2개월이 지나면 우리와 똑같은 대학생으로 우리의 선배 또는 후배였고 친구의 친구였을지도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한편으론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지만 훈련소에서만큼은 나도 기꺼이 그들을 ‘멋진 군인’으로 인정했던 것 같다.
6주간의 훈련을 거쳐 내가 배치 받은 곳은 훈련을 받은 39사단 신병교육대의 상급부대인 제11군단이었다. 훈련소 4주차가 지나면서 상급부대에서 면접을 보러온 적이 있는데 운 좋게도 11군단 군단장님 운전병을 뽑는 데에 내가 뽑힌 것 같았다. 운전병 특기로 입대할 때 지원한 것도 아니고 운전에 그리 자신이 있는 것이 아니어서 조금 걱정이 되기도 하였고 뜻밖의 행운에 조금 기쁘기도 했다. 대기 생활이 지나고 막상 자대로 배치 받은 자대 생활은 정말 견디기 힘든 시간들이었다. 일병을 달기 전에는 운전을 시키지 않는 수송부의 규칙에 따라 나는 수송부에 소속되어 내무 생활을 해야만 했다. 운행은커녕 일주일에 한 번 정도 하는 영내 운전 교육이 전부였고 거의 대부분은 수송부에서 풀을 뽑거나 선임병, 특히 정비병들의 시중을 들어야만 했다. 봄이 되서 꽃이 피고 날씨가 좋아 좋은 것도 있었지만 하루 종일 밖에서 선임병들 눈치를 보며 지내야 하는 수송부 생활은 힘들기만 했다. 얼굴은 까맣게 탔고 하루 일과는 풀을 뽑는 것이라 보람도 없고 끝도 없는 것이었다. 수송부의 일원으로서 하는 일이라곤 선임병들이 자기차를 세차할 때 따라가서 돕는 일이었다. 이등병들은 그 차가 승용차라도 되면 더 기쁘게 세차를 도왔다. 나름대로 군기가 쌨던 수송부는 선임병과 후임병 사이의 불문율이 여러 개 있었다. 직책이 운전병들이라 일단 자기 차를 받으면 공동작업이 없으니 개인적이 될 수도 있었지만 군단 수송부에서 조그만 접촉사고만 나도 운전병 전체가 수송관으로부터 정신 교육을 받고, 그리고 나면 선임병들의 ‘정신 교육’이 시작되었다. 아마도 수송관도 본청의 수송장교로부터, 또 수송장교는 그 위의 군수참모로부터, 또 그는 그 위의 참모장이나 부군단장으로부터 그런 ‘정신 교육’을 받았을 것이다. 사병에게 그런 역할은 최고참 병장들이 하는 경우는 자주는 없었지만 병장들이 소집하는 소위 ‘집합’은 신병들을 바짝 긴장시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더욱이 그것이 간부의 허락까지 받았다면 더욱 그러했다.
우리 부대에서의 ‘집합’이라는 것에는 오랫동안 전해 내려오는 정해진 행동 양식이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은 마치 오래된 전통의 가정이 가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가족회의 같은 하나의 전통적인 ‘의식’과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 양식에 따라 자기 역할을 다 하는 것 같았다. 보통 저녁을 먹고 난 후나 일석 점호 시간 전에 소집되는 ‘집합’ 소식이 전파되면 모든 사병들은 집합을 시킨 선임병의 내무실로 모인다. 중대의 내무실이 운전병용만 5개였으므로 한 내무실에 모이면 발디딜 틈없이 가득 찼다. 그 좁은 공간에서 먼저 후임병들은 집합시에 ‘각’을 잡아야 하는데 주먹을 꽉 쥐고 양반 다리한 무릎에 팔을 쫙 피고 허리를 꼿꼿이 핀 후, 45도 전방을 보는 자세이다. ‘집합’시에 ‘각’을 제대로 잡으면 온몸에 땀이 비오듯 흘렀다. 그리고 잠시라도 긴장을 풀고 편한 자세를 하면 어떤 고참에게 트집잡혀 따로 끌려 나가거나 두고두고 ‘갈굼’의 대상이 되곤 했다. 집합을 시킨 최고참은 잘못을 한 후임 개인에게 주의를 주기도 하지만 주로 그 후임병이 속한 내무실의 바로 위 선임에게 관리 책임을 물었다. 이러한 연좌제는 고참으로선 조직을 관리하기 효과적이면서 동시에 고참의 ‘위엄’을 해치지 않는 것이었지만 후임병의 입장에서는 참으로 고달픈 것이었다. 위에서부터 차례로 내려온 ‘갈굼’이 자신에게 이를 때쯤엔 산을 굴러온 눈덩이처럼 큰 것이 되어있기 때문이었다. 자기 잘못으로 자기의 바로 윗고참이 ‘갈굼’을 당하는 동안 잘못을 한 후임병은 바늘방석에 앉아있는 느낌일 것이다. 최고참이 정신 교육을 하고 내무실 밖으로 나갈땐 그 동기들도 같이 빠져줬다. 그 다음은 다음번 고참들의 차례였다. 소위 차기 ‘왕고’들도 군기를 바짝 잡았다. 병장이 상병들을 나무라면, 상병들은 일병의 잘못과 그들의 이등병 관리 소홀을 혼냈다. 이렇게 공동의 ‘의식’을 통해서 군대조직의 신병들은 군기가 더욱 바짝 들 수밖에 없었다. 이런 군대의 ‘집합’의식은 언제부터일지는 모르지만 아주 오래 내려오는 인습이라는 느낌을 어렴풋이 받았다. 그게 우리 아버지 시대부터인지, 군사정권 시대부터인지는 모르지만 그만큼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 같지 않은 ‘확립’되어있다는 느낌때문이었다.
주로 이등병을 포함한 낮은 계급의 후임병들을 관리하는 것은 일병 3~4호봉의 몫이었다. 그만큼 그들은 병장부터 상병들까지 많은 ‘갈굼’을 당해야 했고 그들은 자신이 받은 만큼 자기 아래 사병들을 괴롭혔다. 자대 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이등병들은 실수를 하기 일쑤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등병에게 요구되는 군기있는 모습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 ‘갈굼’의 이유였다. 이등병이 군대에서는 해서는 안되는 “~요”라는 말을 하거나 식당갈 때 발을 잘 못 맞춰 걷는다거나 하는 실수는 그래도 납득이 가는 것이었다. 말을 시켰는데 목소리가 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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