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의 생애와 교육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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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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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퇴계의 생애와 교육사상
퇴계 이황(李滉)은 조선 초기의 혼란기였던 연산군 시대에 1501년 11월 25일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예안현 온계리에서 좌찬성 식(埴)의 7남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런데 그가 태어난지 불과 7개월 되던 때에 당시 40세의 장년이던 아버지를 여의고 편모슬하에서 자랐으며, 그로 인하여 부친의 훈도를 받지 못하고 또 빈곤한 생활 속에서 자라게 되었다. 부친을 여의던 당시 맏형 한 분만 결혼하였을 뿐 다른 형제는 모두 어려서 가족의 생계를 어머니가 홀로 농사와 누에치기리오 이어가야할 형편이었다. 생활이 곤궁한 중에도 그의 어머니는 그의 자녀들에게 문예만 힘쓰지 말고 몸가짐과 행실을 더욱 삼가 하도록 훈계하였다. 퇴계는 자신의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이 자신의 어머니라 하였고, 퇴계의 어머니는 과부의 자식은 더욱 조신하여야 한다고 가훈을 삼고 엄하게 하였다.
퇴계의 생애는 3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 번째 시기는 초년기로 출생 때부터 33세 때 까지 유교경전을 연구하는데 열중하였던 수학기이다. 두 번째 시기는 중년기로 1527년(중종) 향시에서 진사시와 생원시 초시에 합격하고 어머니의 소원에 따라 과거에 응시하기 위해 성균관에 들어가 다음해에 진사 회시에 급제하였다. 또 34세에 문과 과거에 급제항 벼슬길에 나가면서부터 49세 때 풍기군수를 사직하고 귀향할 때까지의 시기로 대체로 벼슬살이를 하였다. 관료생활을 하면서도 책을 놓지 않고 학문연구에 몰두하는 시기이다. 마지막으로 46세 때 을사사화 후 벼슬에서 물러난 이후 고향에서 구도 생활을 한 시기로 이 때에 토계를 퇴계라 개칭하고 자신의 아호로 삼았다.
구체적으로 보면 퇴계는 이웃 노인에게 천자문을 배우는 것으로 시작해서 12세 때부터는 작은 아버지에게서 ‘논어’를 배웠다. 그는 14세에 이르러서는 비록 사람이 많이 모인 자리일지라도 반드시 벽을 향하여 조용히 생각하고 있을 정도로 학구열이 높아 갔다. 19세 때 봄에 한성에서 실시된 과거 시험에 응시하였으나 합격하지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와서, 성리학의 기본 교과서인 『성리대전(性理大全)』 중 첫째 권과 마지막 권을 빌려 와 읽고 『소학』을 다시 공부하였으며, 영주에 있는 의원에 가서 의술을 배우기도 하였다. 20세경에는 주역을 연구에 몰두하여 침식을 잊고 공부만하다가 신체적 허약증이 생겨 평생의 고질을 얻게 되었다. 나중에 퇴계는 이러한 병을 얻은 원인이, 학문을 올바른 지도해 줄 스승이 없어서 방법도 모른 채 지나치게 무리하였기 때문이라고 술회하였다. 21세 때에 허찬의 장녀를 맞아 혼인을 하고, 22시 때에 조모 김씨가 별세하였다. 이 때까지 퇴계는 주로 집에서만 공부하였다. 비록 12세에서 17세에 이르기까지의 5년간에는 숙부로부터 몇 차례의 독서지도를 받은 적이 있었지만 거의 대부분의 기간은 스승으로부터의 체계적이고 규칙적인 교육을 받지 못하 채 자학을 하였고, 때때로 넷째 형과 사촌 동생, 종매부나 친구들과 절간에서 함께 공부하였을 뿐이다. 24세에 서울로 올라와 태학에 유학하였다. 이 당시에 기묘사화가 일어난 지 5년 밖에 지나지 않은 때이기에 정계의 영향으로 성균관에까지도 도학을 기피하는 풍조가 생겨 『소학』의 실천을 멸시하고 사장만 숭상하는 부박한 사습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퇴계는 이러한 풍조에 물들지 않고 일상의 언어·행동을 『소학』의 규범에 벗어남이 없이 하니 그 당시 동료 학생들 가운데는 그를 비웃는 무리도 있었다. 퇴계는 27세 되던 해에 가을에 경상도 향시를 비롯하여 진사 회시, 문과 별시, 경상도 향시 등을 거친 다음, 34세 때 대과에 급제하여 마침내 벼슬길로 나선다. 한 해에 그는 승무원 정자, 저작을 거쳐 무공량 박사에까지 올랐다. 종3품인 성균관 사성에 이른 43세의 퇴계는 이 때부터 벼슬을 그만두고 교향집에 돌아갈 뜻을 품는다. 벼슬을 버리고 은거한다는 것도 퇴계는 경우에는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세 번째 퇴고 후에 2년의 세월이 지나자 조정에서 퇴계는 52세 때 그에게 홍문관교리 등을 주어 다시 불러들었다. 마지못하여 환조한 퇴계는 해에 성균관 대사성의 자리에까지 오르나 역시 신병을 이유로 곧 사퇴한다. 그에게 학문을 배우려는 학도가 늘어 강학의 장소가 비좁아지자 일찍이 얻어 둔 도산 남쪽에 도산 서당을 지었다. 이 서당을 중심으로 하여 그는 스스로의 학문을 키우는 동시에 후진을 인도하였다. 퇴계는 70세에 자신의 집에서 세상을 떠났다. 퇴계의 삶 속에서 그가 학문하기를 즐겨했던 사람이었음을 발견하였는데 그가 힘써서 학문하니 자연스레 그에게 학문을 배우길 원하는 학도들이 생겨나고 그 수가 늘어나서 강학의 장소를 옮겨 서당까지 짓기에 이르렀음을 보게 되었다. 그는 연산군 때 태어나 중종, 인종, 명종, 선조의 5대에 걸친 정치적 격동기를 살았던 인물이다. 그가 태어나기 3년 전에 무오사화가 일어났고, 네 살이 되던 해에는 갑자사화가 일어났다. 특히 열아홉 살이 되던 해에는 정암 조광조가 희생당한 중중 때의 기묘사화를 직접 목격했을 뿐만 아니라 마흔다섯 살 때 일어난 을사사화에는 자신의 형이 연루되어 죽임을 당하고 자신도 삭탈관직을 당했기 때문에 사화의 직접적인 피해자이기도 했다. 그는 조광조의 지치주의가 권신들에 의해 좌절되는 현실을 목도하고 은둔을 결심하여 짧은 기간을 제외하고는 평생 동안 도산에서 학문을 연구하고 강학하였는데, 그의 치열한 학문적 열정은 동시대 많은 학자들의 귀감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자신 스스로 높은 학문적 성취를 이루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의 학문적 축적은 저술뿐만 아니라 당시 학자들과 교환한 편지글 속에 남아 있다. 그중 정자중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주자의 글을 읽으면서 “마치 바늘이 몸을 찌르는 것처럼, 잠자다가 갑자기 확 깨는 것처럼” 절실하게 느꼈다고 말하고 있는데 여기서 그의 주자학에 대한 치열한 탐구심을 엿볼 수 있다. 이황의 저술 중 대표적인 것들로는 ‘성학십도’, ‘계몽전의’, ‘주자서절요’와 다량의 서간문을 들 수 있으며, 대부분 ‘퇴계집’에 실려있다. 이런 퇴계 이황의 철학 사상 중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은 기대승과의 논쟁을 통해 형성되었는데 이것이 이른바 ‘사단칠정’ 논쟁이다. 이 사단칠정 논쟁은 한국철학사상 가장 중요한 사건 중의 하나이며, 그 발달을 보면 학자 정지운이 작성한 ‘천명도’를 이황이 수정하면서 정지운이 ‘사단은 이에서 바한 것이고 칠정은 기에서 발한 것이다’로 고치자 이에 대해 기대승이 이의를 제기하면서 비롯되었다. 이에 따라 이황과 기대승이 서로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서로의 입장을 설명하기에 이르렀는데, 이것이 바로 유명한 사단칠정 논쟁이다. 이 논쟁은 두 학자 간의 개인적 논쟁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큰 틀에서 보면 당시 학계에 주자학의 이기론과 심성론에 대한 두 가지 다른 해석방식이 공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어날 수 있었던 논쟁으로 해석할 수 있다. 또 이 논쟁을 통해 조선의 주자학은 주자학의 기본이론인 이기론과 심성론을 결합시킴으로써 중국 주자학과는 뚜렷하게 구별되는 독자성을 획득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퇴계 이황은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성리학자이다. 성리학은 중국 송나라의 주자가 그 이전까지 전해져 오던 유고를 북송오자의 이론의 영향을 받아 새롭게 체계화 시킨 학문이다. 성이 곧 리라는 것이다. 이라는 것은 우주 만물의 근본원리이다. 여기서 퇴계 이황은 한국의 성리학의 가장 대표적인 학자로 주자의 이기이원론적 사상을 계승하여 그의 사상을 발전시켰다. 이기이원론은 만물의 존재가 이와 기 두 요소로 이루어졌다고 설명하는 성리학의 이론이다. 천지만물은 이와 기로 되어있는데 이란 우주 만물의 근본원리이며 기란 이런 근본원리에서 나온 현상이다. 이이는 이러한 이와 기의 개념으로 인간의 심성을 설명하였다. 여기서 ‘이귀기천론(이는 귀하고 기는 천한 것), 심성론’이 나오게 되었다.
퇴계 이황의 교육 사상 형성의 배경에는 이기론, 심성론, 사단칠정론이 있다. 이기론은 이(理)란 원래 진리를 뜻하기도 하지만 또 원리, 원칙, 이치 등으로 말하여지는 일체의 법칙을 뜻한다. 이는 흔히 ‘소당연자’, ‘소이연’ 으로 나타내어진다. 그러면서 이 두가지가 서로 대비되는 경우가 있는데 대비되는 경우의 전자가 대체로 규범 법칙을 가리키고, 후자가 자연 법칙의 측면을 가리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 구별이 엄격한 것은 아니다. 이렇게 대비되지 않는 경우라 하더라도 소당연의 뜻이 강조될 때에는 ‘이’가 선의 원리 및 선 자체의 뜻으로 통용되는 경우도 많다. 이가 가치와 밀접한 관계에 있다고 한 것은 이러한 점에서 한 말이다. 그뿐만 아니라 이는 표준의 뜻을 전제함으로써 사물의 형식 또는 본질의 뜻도 가진다.
이의 특성은 물론 초경험적이고 보편적인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이는 형이상자라 지칭된다. 기(氣)는 이와 대조·대비되는 일체의 것을 의미하게 된다. 기는 현상 사물이 실제로 드러나게 되는 ‘존재의 측면’을 가리킨다. 그런 점에서 사물의 ‘질료(자료)’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기의 구체적인 실례가 바로 ‘음양’ 이라는 것이다. 기는 때때로 ‘기운’과 같은 뜻으로 쓰이는가 하면 ‘오행’ 또는 ‘질’과 같은 뜻으로 쓰인다. 그러나 엄밀히 논할 때는 그 ‘경중·청탁·수박’을 분별하는 데 오행 또는 질을 기의 ‘중·탁·박’한 것이라 한다. 이것이 벌써 기의 특성에 관한 것이지만 그 특성은 또 ‘지귀·굴신·취산·생멸’의 성질을 포함한다. 한마디로 하면 이는 ‘무작위’한 것인데 반하여 기는 ‘유위’한 것이다. 따라서 모든 현상이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 기이다. 그러므로 기는 감각이 가능한 것이고, 그런 점에서 ‘형이하’의 것이라 한다. 이와 같이 이와 기는 사물의 생성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것일 뿐 그 한 가지만으로는 어떤 구체적인 사물일 수 없다. 그러므로 이론상 서로 떨어질 수는 있지만 실제로는 떨어져 있을 수 없는 관계이다. 실제 사물 상으로는 둘이서 함께 하나의 구체적인 사물을 이루며 어디까지나 함께 있다는 것이다. 우주·자연에 있어서 퇴계 이황은 일단 주론이의 태극도설이나 주희의 계몽전 등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의 성학십도, 계몽전의, 천명도설 등에서 그러한 점이 확인된다. 그는 인간과 만물의 물론 그 총체인 우주·자연 이 모두 리(理)와 기(氣)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