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강 최한기의 경험 중심 교육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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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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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조선의 대표적 실학자 최한기는 당대를 떠나 시대를 초월한 학자이다. 정약용과 같은 실학 세대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최한기에 대한 연구는 뒤늦게 시작되다. 최한기의 학문이 오늘 우리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극히 최근의 일이다. 최한기를 최초로 발굴한 사람들은 북한학자들이었다. 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에서 펴낸 정진석, 정성철, 김창원 공저의 제1판은 1960년, 제2판은 1962년. 김용옥, (2004) ‘혜강 최한기와 유고’
를 그 효시로 꼽을 수 있다. 서울대학교 철학과의 박종홍 교수는 이 에서 받은 충격으로 ‘한국철학사’를 새롭게 정립해야겠다는 뜻을 세우게 되었고 최한기에 대한 논문도 구상하게 되었다. 김용옥 (2004) 혜강 최한기와 유교, 통나무
이후 학자들이 연구에 박차를 가하게 되고 그로 인해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개인적으로 그다지 평탄하지 못한 삶과 다양하지 않은 학문적 가르침과 동료 속에서 최한기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는지. 그러한 배경이 그로 하여금 스스로 학문하는 것을 터득하게 한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학문적인 고독은 새로운 것을 바라보는 시각을 갖게 하고, 그 시각이 새로운 이론을 만들어 내었다면, 최한기가 품고 있는 고독의 내용을 파헤쳐보고 싶다는 호기심이 들었다. 이 호기심은 그를 잘 알지 못했기 때문에 가중되었을지도 모른다. 단지 이름 석 자만을 들었을 뿐, 최한기라는 인물을 감싸고 있는 환경, 그가 환경과 작용하는 과정에서 탄생된 사상의 주축이 무엇인지를 잘 모르고 있었다. 여러 편의 학술지 자료를 보면서 ‘최한기’의 깊은 생각을 읽고 싶은 충동이 생겼다. 최한기가 일생을 통해 일궈낸 ‘학문의 고독’이 남긴 사상들을 짧은 시간에 섭렵한다는 것이 무리가 있겠지만, 분명한 것은 과거 최한기에 대하여 알고 있던 몇 개의 단어로 표현했던 수박 겉핥기는 아니라는 것이다.
‘반동’과 ‘수용’이라는 두 개의 틀을 갖고 최한기에게 접근해 보려고 한다.
‘반동’은 전통적인 유교적 사상과 그가 살고 있던 시대에 대한 문제의식의 발로로 새로운 것을 찾아가는 것이며, ‘수용’은 그 당시 새롭게 전해지기 시작한 서양문물을 받아들이는 자세이다. 이에 발제자는 최한기의 사상이 형성된 배경으로 그를 둘러싼 학문적 배경과 그의 기철학에서 비롯된 경험학습에 대하여 학술지를 중심으로 고찰해보고자 한다.
본론
최한기의 생애와 학문적 배경
최한기는 개성지역에서 세거해온 삭녕 최씨이나 본래 최항의 혈손은 아니었다. 다만 사회적 지위의 상승을 위하여 최한기의 선계가 최항의 후손으로 입적됨에 따라 최항의 양후손(養後孫)이 되었던 것이다. 그 때문에 최항의 혈손들과는 대대로 내왕이 거의 없었던 것 같다.
최한기 가문은 고조부가 효행과 학생이 있었고 이어 증조부 형제가 모두 무과에 급제하여 무과 집안으로 사회적 지위를 높였으며, 그 뒤 생부 최치현이 시인으로 활동하였고 최한기가 1825년 생원이 되고 아들 최병대가 1962년 문과에 급제함으로써 신분상승을 도모하였다. 최한기의 양가(養家)는 생가와 달리 확고한 무과집안이었다. 양조(養組) 최배관이 무과에 급제하였고 양부(養父) 최광현이 1800년 무과에 급제하였다. 최한기의 양가의 모습에서 18세기 중반에서 19세기 초에 일반 양인에서 새로 양반으로 지위를 상승해가는 신흥사족 층의 한 갈래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권오영(1998) 동양철학연구 Vol,18 No.-, ‘최한기의 생애와 학문편력’에서 발췌
최한기는 신분적으로 보면 이전 십 여대에 걸쳐서 내세울만한 벼슬이 라고는 없고, 최한기 자신도 일개의 생원으로 칠십 평생을 보내는 동안 반반한 실직(實職)의 한자리도 얻지 못한 것으로 보아 신분은 비록 양반이었지만 실제 중서층(中庶層)에 비하여 별로 내세울 것이 없다고 볼 수 있다.(이우성,1986.재인용) 이런 장황으로 미루어 판단해보면 최한기는 당시 양반 관료계층으로부터 신분적으로 벗어나 있는, 그래서 당시의 당파적 색체를 드러내지 않으면서 자신의 학문적 입장을 자유롭게 드러낼 수 있었던 조건을 지니고 있었다. 즉 신분적 지위를 가지고 당파적 갈등 속에서 처신했던 다른 실학자들은 학문적 입장 제시가 정치적 보복의 빌미로 작용했던 것이 당시의 사회적 상황이었다면, 최한기는 최소한 이러한 상황을 벗어나 있었고, 그래서 유기론적 입장과 더불어 주자학에 대한 강력한 비판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따라서 실학자 일반이 지니고 있었던 한계들을 동시에 극복하고 있었기 때문에 최한기는 한국 실학사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독보적인 의미를 지신 인물이라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서욱수(2002) 한국사상과 문화 Vol. 15 No.-, 최한기 인식이론의 기초 연구‘에서 발췌
최한기는 어린 시절 외조부 한경리로 부터 학업을 전수받았을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최한기는 34세 때 외조부의 문장을 후세에 전할 수 있는 문장으로 평가하고 외조부를 ‘선생’으로 칭하고 자신을 ‘소자’로 일컫고 있다. 이것은 최한기와 한경리의 관계가 외손자와 외조부의 관계일 뿐 아니라 어린 시절 선생과 제자의 관계임을 말해 주는 것이다. 그렇게 최한기는 소년기부터 주부와 생부, 양부로부터 동몽교재를 익혔을 것이고 밖으로는 외조부 한경리와 유학자 김헌기를 스승으로 삼아 유학공부를 하였을 것이다. 이런 그의 학문터전은 유학에서 출발하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상게서
참고문헌
참고자료
강원모 (2005) 교육연구 Vol. 19 No.-, 최한기의 기화적 인식 체계와 교육관
권오영 (1992) 한국학보 Vol. 18 No.3, 최한기의 교우와 그 가문의 내역
권오영 (1998) 동양철학연구 Vol, 18 No.-, 최한기의 생애와 학문편력
김근희,황해익 (2007) 생태유아교육연구 제6권 제1호. 201~226 혜강 최한기 교육사상의 유아교육적 함의
김용옥 (2004) 혜강 최한기와 유교, 통나무
박준영,천정미 (2005) 교육사상연구 제 17집, pp59~75 최한기의 경험주의 진리관과 교육관
서욱수 (2002) 한국사상과 문화 Vol. 15.No.-, 최한기 인식이론의 기초 연구
임민혁 (2003) 한국행정학회 학술대회 발표논문집 Vol. -No.-, 혜강 최한기 사상의
현대적 조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