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나게긴시치의창조 교육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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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이나게긴시치의창조 교육론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이나게(毛)의 ‘창조교육론’은 교육이라고 하는 행위를 ‘창조’를 근본원리로서 설명하려고 하는 시도이다(毛57). ‘창조’는 ‘자기초월’이라는 의미로 ‘자유’이며 그 ‘자유’는 베르그송이 말한 ‘생명의 약동’이 창출되는 것이다. 사람에게 생명이 약동할 때, 사람은 거의 의식적이거나 혹은 강한 충동으로 어떤 종류의 활동에 전념하게 된다. 그러한 전념활동은 고유한 행위임과 동시에 당사자를 보편적으로 고양시키는 행위이다. 바꿔 말하면 사람은 각각 ‘유일한 사람’ 즉 대체 불가능한 존재이지만 그와 동시에 ‘전체적으로 보편적인 무언가를 나누어 지닌’ 존재이다(毛78,61,66,69).
#181
이나게(毛)에게 있어서 인생이란 베르그송의 말을 빌리면 ‘창조적 진화’이다((毛61). 즉 부단히 노력하고 독자적(유일적) 또는 우수한 것(전체적으로 보편하게 공헌한 것)을 새롭게 계속 창출해내는 것이다. ‘교육’이라고 부를 수 있는 행위는 그 행위에 있어서 생명이 약동하고 있는 행위이다. 따라서 교육자는 아이들의 ‘자유’ 즉 ‘생명의 약동’을 존중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은 교육자의 작용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교육자가 아이들의 ‘창조’적 행위를 지원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창조지원으로서의 교육은 문화 창조를 가져오는 교육이다.
중요한 사실은 이나게(毛)에게 있어서 인생을 창조적으로 진화시키는 원동력이 타자로의 무조건적인 ‘사랑’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무조건적으로 다른 사람을 도와주고 지원해 줘서 그 ‘생명의 약동’을 높이는 행위로서의 사랑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사랑이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키고 이 생명을 사랑하고 그 생육을 무조건적으로 도와주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사랑은 타자를 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향하고 있기 때문이야말로) 자신을 윤리적으로 높인다. 이나게(毛)에게 있어서 이러한 사랑은 자신과 함께 타자를 진정한 의미에서 ‘살리는 힘’이다(毛 1915: 4). 즉 창조교육의 유일하고 최고의 원동력은 무조건적인 사랑이다. 이와 같은 이나게(毛)의 사랑 사상은 ‘도덕과 종교의 두 가지 원천’에서의 베르그송의 사랑 사상을 떠오르게 할 것이다(베르그송의 사랑에 관해서는 종장을 참조하기 바란다). 이어지는 히구치 초이치(口長市)의 강연에서도 베르그송은 언급되고 있다.
히구치 초이치(口長市)의 ‘자학교육론(自學敎育論)
히구치가 말하는 자학교육은 지식교수(知識敎授)로서의 교육에 대한 아이들의 ‘자학’에 의해서 그 여러 능력을 충분히 발달시키는 교육이다. ‘자학’은 스스로 배우는 것이며, 그것은 아이들 자신이 배우는 방법을 몸에 익히면서 배우는 것이다.
#182
히구치에게 있어서 지식교수로서의 교육은 헤르바르트주의의 교육방법이며 지식에 의해서 정의(情意)가 생긴다고 하는 ‘주지설(主智說)’을 말하는데 자학으로서의 교육은 의지에 의해서 지식이 증대한다고 하는 ‘주의설(主意說)’이다(口 94). 히구치의 주의설은 쇼펜하우어(Schopenhauer, Arthur 1788-1860)의 사상에 유래한다. 히구치가 말하는 의지는 본능· 충동에 포함되어 있다. 특히 중요한 것은 아이들이 스스로 발전하고 신장하는 힘으로서의 ‘학습본능’(‘학습충동’)이다. 이 학습본능 속에 ‘작업본능’(‘구성본능’)이 있고 이것이 목적을 정하여 그것을 달성하려고 하는 목적 합리적 활동을 창출해낸다. 학습본능은 의도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학은 우발적으로 생기는데 자신의 배움을 돌아보고 자신의 배우는 힘을 활성화시켜서 자신이 ‘확대’한다고 느낄 때, 다시 말해서 ‘자아의 발전확장’이라고 하는 ‘자아의 자각’이 생길 때, 자학은 의도적으로 생기게 된다. 이러한 ‘자아의 자각’, 바꿔 말하면 자기인식활동은 내가 내 자신에게 머무르지 않고, 타자에게, 혹은 사회로 넓혀가는 것을 함의하고 있다(口 97, 100, 102-103).
히구치는 이러한 ‘자아의 자각’ ‘자학’이 나로부터 타자, 사회로 확산되어 갈 때, 사회는 보다 좋아질 것이라고 말한다. ‘자아의 자각’ ‘자학’의 원천이 ‘생명’에서 유래하기 때문이며, 소위 자신과 타자· 자연과의 서로 협동(공생)을 그 본태(本態)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히구치의 이러한 생명론은 베르그송이나 니체의 그것과 같다. 그것은 ‘자학교육론’ 이후의 저작, 『의적생명론(意的生命論)에 입각한 나의 자학주의 교육』 (1925), 『생활교육학』 (1935)에 나타나 있다. 히구치의 생명론은 ‘생명’을 주어진 존재라고 위치 매김하여 ‘생활’을 그것이 명백하게 드러낸다고 규정하고 있다. 생명의 본질은 보다 좋은 상태로 지향하는 것이기 때문에 생명의 힘이 명백하게 드러나면 드러날수록 사람의 생활, 사회의 상태는 보다 나아지게 된다. 학교에서의 ‘생활지도’도 생활준비를 위한 지도가 아니라 보다 나은 상태로의 동태(動態)· 역동적인 생명을 분명하게 드러내기 위한 지도이다. 단 여기에 해결할 수 없는 어려운 문제가 생긴다. 생활은 본래 ‘자발적’이기 때문에 지도받는 것에 익숙하지 않다. 지도받는 생활은 지도를 넘어서 ‘자발적’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 ‘생명적이든’ ‘자발적이든’ 지도 그 자체가 그 내용에 위배가 되는 것이다.
#183
이어지는 데즈카 기시에(手塚岸衛)의 강연에서도 자발성이 중시되고 있는데 거기에서는 베르그송에 대한 언급은 찾아볼 수 없다.
데즈카 기시에(手塚岸衛)의 ‘자유교육론’
데즈카가 말하는 ‘자유교육’이라는 것은 철저한 ‘자학주의’에 근거한 교육이다. 데즈카가 말하는 ‘자학’은 히구치가 말한 ‘자학’과는 약간 다르며 교과, 교과 외, 그리고 자치활동의 여러 분야에서 아이들이 ‘진· 선· 미’의 체현(體現)· 표현을 지향하고 독자적인 실천을 활동적으로 전개하는 것이다. 이 ‘진· 선· 미’의 체현(體現)· 표현을 지향하는 자기활동이 데즈카가 말하는 ‘자유’이다. 바꿔 말하면 진리를 향한 노력, 도덕에 대한 의무감, 예술에 감동하는 감성에 물들여진 활동이 그가 말하는 ‘자유’이다. 데즈카는 이러한 ‘자유’를 향수하면서 ‘진· 선· 미’라고 하는 규범에 의해서 외적자연(자연환경)· 내적자연(내면성)을 ‘통합해 정리’하여 파울 나토르프(Natorp, Paul: 1854~1924)의 ‘신(新) 칸트학파 이상주의’(실질적으로는 플라톤의 이데아론)에 의거한 시노하라 스케이치(篠原助市: 1876-1957)의 말을 빌려서 ‘자연의 이성화’라고 부른다. 즉 외적자연으로부터 도덕규범에 의해 선(善)의 세계가 창조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자유교육은 ‘자연의 이성화’를 도와 자유의 확대를 도모하는 것, 자유를 향유하면서 자연생활로부터 문화생활을 창조하는 행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