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산 허균蛟山許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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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교산 허균蛟山許均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우리의 고전 문학에서 「홍길동전」을 빼놓고 소설을 이야기 할 수 있을까?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는 홍길동전의 대목은 당시 조선의 적서차별을 간결하지만 적나라하게 표현해 준다. 또한 국문학을 조금이라도 공부해 본 사람이라면 「홍길동전」의 영웅의 일대기적 구성은 의미가 깊은 주제로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홍길동전의 저자인 허균에 대해 자세히 아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혁명을 주장했다가(사실인지, 누명을 썼는지는 불분명함) 역적으로 처형을 당했다는 표피적인 사실만을 알고 있지 않은가? 혹은 최고의 여류시인인 허난설헌의 동생으로만 기억하고 있지 않은가?
그는 당대 명문가의 집안에서 태어나 자유로운 사상(불교, 도교 등)을 추구하고, 어느 것에도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으려 했던 사람이다. 정치, 문학, 생활 전반에 대한 그의 생각과 사상은 전체 조선 사회에 큰 울림을 주었고, 오늘날에도 그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우리는 허균을 입체적으로 조망하기 위해 그가 지었던 「성소부부고」에 실려 있는 유재론, 호민론을 중심으로 다섯 가지의 전을 고찰해 보고자 한다. 그리고 그의 생애를 연대기 순으로 정리하며 파란만장했던 삶을 살펴보고자 한다.
허균이 살았던 시대
조선왕조 오백여 년은 당쟁의 세월이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지금도 정치권에서는 자신의 이념과 정치 방향에 따라 여, 야로 나뉘어 정치적 균형을 이루려하는데, 조선시대 역시 각 유파별로 나뉘어 정치적인 결정에 영향력을 행사 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당쟁은 백성들의 삶을 위해서라기보다는 권력을 점유한 소수의 지배자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세력다툼이었다는 데 문제가 발생한다.
허균이 살았던 시대는 선조, 광해군 시대로서 조선 중기에 해당한다. 이 때는 긍정적으로 나아갈 수 있었지만, 조선조 최대의 폐해로 꼽히는 당쟁의 시발점이기도 한다. 그들만의 성벽을 공고히 구축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평민의 정치참여를 금지시킴으로써 그들이 누리는 권력의 정당성은 상실되었다. 이는 정치와 백성의 괴리를 심화시켰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내부적 사회 혼란은 더욱 심화 되었다. 특히, 임진왜란은 국가의 재정을 악화시켜(경작지 170만결 → 54만결) 양반들의 권력다툼을 격화시켰고, 부족한 재원을 보충하기 위한 가렴주구는 더욱 심해졌다.
당쟁으로 인한 정치적인 혼란과 임진왜란으로 인한 민생의 피폐함은 신분사회의 동요와 해체의 바람으로 나타났으며 민중의 자각을 유도하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조선 중기 사회의 이 같은 현상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태도에 큰 변화를 남겨주게 되었다.
허균의 생애
“이름이 천하 후세에 전할 것이다” : 성장기 / 수학기
교산 허균(1569~1618)은 본관이 양천(陽川)이고, 자는 단보(端甫)이며 초당 허엽의 3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출생지는 서울 건천동 혹은 강릉의 외가라고 알려진다. 부친 허엽은 문장가로서 문명(文名)이 높았으며, 서경덕의 문인으로 대사간과 경상감사 등을 지냈다. 나중에 동인과 서인으로 조정이 갈라질 때, 김효원과 함께 동인의 우두머리로 활약하였다. 허균의 이복형제로는 우성전에게 출가한 누이와 형 허성이 있다. 허균의 자형 우성전은 이황의 문인으로 후에 동인에서 갈라진 남인의 영수로 활약한 인물이다. 큰 형 허성은 유희춘의 문인으로 이조판서, 병조판서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특히 허성은 허균이 44세가 되던 해 죽었는데 그 이전까지 허균의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허균의 동복형제로는 형 허봉과 누이 허초희가 있다. 허봉 역시 허성과 함께 유희춘의 문인으로써, 세 살 차이인 형보다 11년이나 앞서 대과에 급제한 수제였다. 허균에게는 가족 가운데 가장 많은 영향을 준 인물로 전해진다. 동인의 중심인물로 활약하다가, 이이를 탄핵한 뒤 귀양을 떠나게 되었고, 이후 다시는 벼슬하지 않고 유랑생활을 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그의 누이인 허초희는 비록 불우한 삶을 살다가 젊은 나이에 요절했지만 조선 최고의 여류시인으로 일컬어지는 인물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허균은 당대 최고의 명문집안 출신이었다. 아버지를 비롯한 3형제와 자형 등이 동인, 남인으로 이어지는 당쟁의 중심인물로 활약하였다. 이러한 까닭에 ‘선조수정실록’에서는 “허씨가 당파의 가문 중에 가장 치성하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