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색의 생애와 교육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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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이색의 생애와 교육사상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이색은 고려말의 대학자로써 자는 영숙(潁叔)이고 로는 목은이며, 본관은 한산(韓山)이다. 충숙왕15년에 경상도 영해부에서 태어나 조선 태조 5년에 69세로 세상을 떠났다.
이색은14세에 충혜왕 복위2년에 성균시에 합격하고, 20세인 충목왕3년에 아버지 곡을 찾아 연(燕)에 가서 그 곳에서 국자감 생원이 되어 3년 동안 수학하였다. 24세인 충정왕3년에 아버지의 부름을 듣고 귀국하였으며, 공민왕2년에는 문과에 급제하여 숙옹승(肅雍丞)을 제수 받았다. 이때부터 그의 관로(管路)생활이 시작된다. 이해 가을에 그는 정동성 향시에 1등으로 합격하고, 다음 해에는 원의 연경에서 제과에 급제하였다.
이색이 관로에 진출하는 공민왕2년은 이제현, 이인복, 백문보등이 주체가 되어 정치개혁이 진행 중에 있었던 시기이다. 이색도 당시 개혁 주체세력인 이들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 또한 그도 개혁의지에 충만해 있어 과거에 등제하기 전년인 공민왕 언년에 상(喪)중 임에도 불구하고 “시정오사(時政五事)”를 올려 당면정치의 개혁을 건의하기도 하였다. 일로써 그는 관로에 진출하자 개혁정치의 선봉에 서게 되었고, 공민왕 5년에는 다시 “시정팔사”를 올려 당면정치의 시폐를 논하고 이를 개혁하도록 건의하였으며, 공민왕 12년의 개혁에도 중추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이와 같은 그의 정치적 식견은 당시 개혁세력의 지지를 받았으며 이러한 그의 능력으로 공민왕 때에 그의 정치적 진로는 매우 순조로웠다. 공민왕2년 숙옹승으로 시작한 그는 동왕5년에는 이부시랑(吏部侍郞) 한림직학사(翰林直學士)로 진출하였고, 다음해에는 시국자 좨주를 배수하여 국자감 교육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동년6월에는 사간(司諫) 이보림, 정추등과 함께 염철별감(鹽鐵別監)의 폐단을 논하여 이를 시정하도록 건의하였고, 동왕12년에는 동왕10년의 홍건족 침입 때 왕을 호종한 공으로 호종일등공신으로 책록 되었으며 공민왕16년에는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로서 성균관 대사성을 겸하여 성균관의 증건과 교육중흥에 크게 기여하게 된다. 이색이 교육자로서 한국교육사에 크게 각광을 받게 되는 것도 이 시기의 교육활동이다. 동왕20년에는 정당문학(政堂文學)이 되고 동왕22년에는 한산군(韓山君)에 봉착되었다. 공민왕은 이색의 학문과 정치적인 식견을 크게 존경하여 그를 사부(師傅)의 예로 대하였다. 공민왕을 계승한 우왕도 이색을 사부로 삼고, 동왕3년에는 추충보절동독찬화공신(椎忠保節同德贊化功臣)의 호를 더하고 영예문춘추관사(令藝文春秋館事)를 제수하였다. 동왕14년에는 한산부원군이란 최고의 직을 받게 된다.
그러나 이색은 우왕 때는 이미 정치에 의욕을 잃고 은퇴하려고 했던 것 같다. 이것은 우왕 때에 지은 호불귀(胡不歸)라는 시에 보이고 있다.
이로써 이색은 우왕 때 수차에 걸쳐 병을 핑계로 관직에서 물러나기도 하였고, 또 벼슬에 나아갔다 하더라도 얼마 되지 않아 사의를 표명하기도 하였다. 우왕 즉위 이후 외척과 권문세족이 다시 발호하게 되고 공민왕 때의 개혁세력들이 대부분 축출 당하게 되자 근ㄴ 그의 이념을 실현시킬 수 없다는 좌절감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우왕 14년 위화도 회군으로 우왕이 폐위되고 그의 도움으로 창왕이 즉위하자 창왕은 그에게 문하시중을 제수하고 추중보절동덕찬화보리(推忠保節同德贊化輔理)의 호를 내렸으며, 다음해에는 조준의 사전개혁이 나타나자 그는 이를 반대하였고 이로써 그는 이성계 일파와는 대립관계에 서게 된다. 1389년 이성계일파가 폐가입진(廢假立眞)을 내세워 창왕을 폐위 시키고 공양왕을 즉위시켰다. 공양왕은 즉위하자 그에게 판문하사를 제수하였으나 열흘도 못 되어 창왕을 즉위시킨 죄를 규탄한 이성계일파의 탄핵을 받고 장단(長湍)으로 유배된다. 이후 함창, 청주, 한주, 긍주 등으로 유배당하기도 하고 또 그간 수차에 거쳐 투옥당하기도 하였다. 1392년 조선이 건국되자 태조가 수차에 걸쳐 조정에 나오도록 권고하였으나 끝까지 절의를 지켜 이를 거절 하였다. 1396년 5월에 여흥(麗興)에서 세상을 떠나니 향년 69세였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색의 일생을 조감하면 , 출생(1328)이후 공민왕 2년 까지는 성장 및 수확기로 볼 수 있을 것이며, 공민왕 2년에서 공양왕 4년까지는 관로활동기로 볼 수 있고 조선건국 이후 1396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관로에서 은퇴하여 절의를 지킨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2.이색의 교육사상
교육적인 측면에서 이색은 성균관 대사성을 역임 하면서 성리학 발전의 토대를 쌓았다고 볼 수 있다. 이색은 인간의 내면을 바탕으로 한 정치론을 중시하였고 제도자체의 변경보다는 제도의 운영의 묘나 부분적인 제도개선을 생각했다. 우선 이색은 과거제도에 대하여 제도개선론을 제기한다. 교육개혁에 관한 그의 의지는 관료에 진출하기 이전부터 보이고 있었다. 공민왕이 즉위하던 해에는 학교교육이 크게 침체하여 거의 유명무실 하고 있었다. 이로써 그는 학교교육의 중흥을 당면한 정치과제로 보아 시정오사의 하나로 건의하였다. 그는 같은 개혁안에서 향교 학당 십이도 성균관의 학교 교육 진흥과 이들 상호관의 관계를 법으로 규정할 것을 건의 하고 있다. 이것은 그간 이들 학교의 퇴락상이 심각한 상태에 이르렀고, 또 이들 상호간의 승차과정도 문란하여 결과적으로 교육체계가 붕괴됨에 대한 개혁론이기도 하다. 이색은 경학의 부흥과 신흥유신의 양성을 통해 권세가의 기반을 악화 시키고 성리학을 보급시키려 하였기 때문에 신돈의 개혁정치에 적극 참가 할 수 있었다. 이색은 과거제에 대하여 각급학교가 퇴폐하고 과거제가 제대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한다고 이해하고, 그 이유를 벼슬하는 사람이 과거를 거치지 않고, 급제자라도 국학을 거쳐 급제한 것이 아닌 것에서 찾았다. 즉 향교와 학당에서 인재를 선발하여 성균관에서 학습하도록 반드시 국학을 경유하지 않으면 과거에 응시하지 못하도록 제도화 하였다. 이색의 교육론은 그의 유학진흥책에 나타나 있는데, 그것은 유풍을 일신하여 교육을 새롭게 하는데 있다. 그의 교육사상은 윤리구현과 치인치세의 규범과 풍교를 순화하려는 의리의 확립에 기저를 둔 것이다.
또 이색이 성균관 대사성 재직 시에 성균관 학생수를 대폭 증원하고 그에 따른 시설확충에 도서구비를 추진하는 등 성리학 진흥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리고 교수방법에서도 유능한 경술지사가 교과를 담당케 하였다. 여러 교관들은 경전을 각기 분담하여 교수하고, 강론이 끝나면 매일 서로 의론하여 구극의 진의를 밝히도록 하였다.
@참고문헌@
정재철, 이색 시의 사상적 조명, 집문당, 2003
牧隱 硏究會, 牧隱 李穡의 생애(生涯)와 사상(思想), 一潮閣, 1996
두선영, 李穡의政治思想, 전주대 교육대학원, 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