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말선초의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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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여말선초의 철학
여말선초 시대적 상황
여말 선초라 함은 고려 말에서 조선 초까지를 이르는 말인데
고려 후기에 이르면 지도층인 권문세족[權門勢族]과 그 성격을 근본적으로 달리하는 일군의 사회비판세력이 성장하고 있었다. 그것이 바로 신진사류 계층이었다. 이들은 경제적인 면에서 지방토착세력으로 향리에 소구모의 농장을 가지고 있는 중소지주층이거나 자영농민층 출신들이었다. 이들은 여러 가지 불법적인 수단으로 막대한 농장을 소유하게 된 권문세족들을 경멸하였으며, 자연 신진사류들이 주장하는 사회개혁의 방향은 권문세족의 부정청결에 무게를 두게 되었다.
공민왕의 개혁정치는 대외적으로 친명반원[親明反元]을 표방하였고 대내적으로 권문세족의 세력을 견제하려고 하였다. 그렇지만 당시 복잡한 국제정서는 지속적인 개혁의 실시를 어렵게 하였고, 그 동안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했던 권문세족들의 기반이 굳었던 까닭에 그의 개혁은 성공하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진사류들의 성장에 획기적인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는 점에서 공민왕대가 지니는 의미는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즉 공민왕이 개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신진사류들을 중용하였고 특히 그들의 활동 무대로서 성균관을 중영[重營]하였던 것이 그것이다.
고려후기에 내부적으로 권문세족과 신진사류 사이의 대립이 본격화되고 있을 무렵 밖으로부터 압력도 가중되고 있었는데, 그것이 원명 교체에 따른 대외관계의 변동이었다. 14세기 고려와 원나라의 관계는 이전 시기의 사회경제적 모순과 정치적 외압을 더욱 심화시키는 것이었으며, 그러한 모순이 해결되지 않는 한 고려사회는 멸망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변화 조짐은 14세기 중반 원나라의 세퇴와 함께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 동안 고려를 압제해 온 원의 세력을 축출하고자 하는 개혁운동이 일어났고, 신흥하는 명나라에 대하여 정통을 인정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그러나 국내에는 아직도 친원세력이 즉세하고 있었으므로 외교정책을 둘러싸고 친원친명파는 대립갈등하였다. 친원파는 이전부터 원과 연결되고 있었던 권문세력들이 주류를 이루었던 것에 반하여, 친명파는 반원 정책을 추구하던 공민왕을 정점으로 신진사류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러한 친원친명파의 대립 속에서 1374년 공민왕이 시해되자, 어린 우왕을 즉위케 한 후 정권을 잡은 이인임[李仁任]은 원과 명에 두 다리를 걸치면서 양명외교를 추구하였다. 우왕 원년 5월 북원[北元]사신의 입국에 대하여 박상충[朴尙衷, 1332~1375]등의 신진사류들이 반대의 입장을 뚜렷하게 표명하여 외교정책을 둘러싼 마찰이 빚어짐에 따라 이인임 등은 친원에 반대하는 신진사류들을 대거 귀향을 보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대륙에서 명의 세력이 강화됨에 따라 친명 성향과 외교적 능력을 지닌 신진사류들은 정계에 다시 등장하여 명과의 외교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었고 친원파는 점차 힘을 잃게 되었다.
한편 우와 14년 5월 이성계[李成桂]에 의해 단행된 위화도 회군은 신진사류들 사이에 분열과 갈등을 증폭시킨 도화선이 되었다. 곧 신진사류들이 위화도 회국을 계기로 첨예하게 대립하였으니, 하나는 고려말의 신민[臣民]으로서 고려에 충성을 다해야 한다는 대의명분으로 고려를 중흥시키고 개혁을 추진해야 한다는 체제유신적 입장과, 다름 하나는 당신의 적폐[積幣]와 설정으로 보아 고려는 명운[命運]이 다하여 어찌할 도리가 없으니 이제 혁명으로 새 나라를 열어야 한다는 체계적입장과의 갈등이었다.
결국창왕[재위1388~1389]의폐출과 공양왕[재위 1389~1392]의 즉위에 임하여 이초윤이의 사건 등을 통해 보수파에 대학 대대적인 숙청이 이루어졌으며, 혁명파에 의하여 공양왕 3년 5월 과전법[科田法]이 공포되었다.
이어 혁명파는 1392년 4월 고려조의 유지를 견지하며 당대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던 정몽주를 격살하였다. 같은해 7월12일 공양왕은 강원도 간성으로 폐출되었고, 이어 7월 17일 신료의 추대로 이성계가 왕위에 오름으로써 조선조의 창업을 보게되었다.
고려말의 주자학의 수용
일반적으로 고려 말의 주자학 소개는 안양이 원으로부터 주자서를 도입한 데서부터 비롯되었으며, 그것이 백이정(白正 1260~1340)권부(權溥 1262~1346)우탁(禹倬 1263~1342)등의 연구와 보급에 의해 이제현(李齊賢 1287~1367)이곡(李穀 1298~1351)이색 등으로 이어지면서 수용되었다는 것이 통설로 인정되고 있다.
안양은 당시 주자서가 세상에 성행하지 않았는데, 중국에 가서 이를 처음으로 보고 손수 그책을 배끼고 공자와 주자의 진상을 모사하여 돌아왔다고 하며 사람을 중국에 보내어 공자와 칠십제자의 상[像] 그리고 제기[祭器], 악기[樂器] 빛 육경[六經]등을 구하여 왔으며, 섬학전[贍學錢]을 마련하여 국학의 재단을 튼튼히 하였다. 그리하여 점차로 성균관을 중심으로 유학의 중흥이 일어나게 되었다.
안향의 문하에서 수학한 백이정이 그의 뒤를 계승한다. 백이정은 권부, 우탁과 함께 수학하다가, 그 후 충선왕[忠宣王]을 따라 원나라에 가서 10년 동안 유학하면서 정주(程朱)의 성리서[性理書]를 많이 구하여, 이를 가지고 귀국하였다. 이에 권부가 『사서집주[四書集注]』를 간행하여 전파함으로써 비로소 학자들이 도학[道學]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한다. 그러나 이들은 주자학 도임의 단서를 열었을 뿐, 본격적으로 뿌리를 내리게 된 것은 이색에 이르러서였다. 이제현의 문인인 이색은 그의 부친인 이곡을 따라 원의 국자감 생원으로 3년간 재학하는 동안에 원의 학자들과의 교분을 통해 주자학을 연구하였다. 이색은 공민왕 16년(1367) 성균관의 대사성(大司成)이 되어 당시 정몽주[鄭夢周 1337 ~ 1392]박상충[朴尙衷], 이숭인[李崇仁] 등을 교관[敎官]에 임명하여 후진 양성의 교육에 더욱 전력함으로써, 비로서 흥기하게 되었다고 한다.
도덕적 실천주의 학풍으로 전개된 원대의 주자학은 고려 말의 신진사류들에 의해 선택적으로 수용되었으며, 신진사류들은 이를 사회적정치적 제 문제에 적용함으로써 심중한 의미를 지니는 사회적 기능을 수행하게 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