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유성영 화기

 1  프랑스 유성영 화기-1
 2  프랑스 유성영 화기-2
※ 미리보기 이미지는 최대 20페이지까지만 지원합니다.
  • 분야
  • 등록일
  • 페이지/형식
  • 구매가격
  • 적립금
자료 다운로드  네이버 로그인
소개글
프랑스 유성영 화기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1928년 마르셀 방달이 전축판의 소리와 화면이 서로 맞아떨어지도록 만든 영화 을 발표한 바 있었고, 그 이듬해에 가스똥 라벨은 무성영화 필름에 노래 한 곡과 몇 개의 대사를 녹음한 영화 를 만들었다.
1929년 문자 그대로 100%유성으로 제작된 장편 영화 세 편이 마침내 유럽에서 발표된다. 하나는 앙드레 위공이 런던의 스튜디오에서 제작한 였고, 다른 하나는 베를린의 스튜디오에서 제작한 헨리 루셀의 , 마지막 것은 프랑스 루앙에서 앙리 쇼메이트가 제작한 였다.
1930년대 유성적 영화의 등장 (1927,미국) ▶실헌적 영화들의 열기는 갑작스럽게 사그라듬.
2. 시적 리얼리즘
1930-40년대 프랑스 영화계를 주도하면서 세계 영화 시장에서 프랑스 영화의 제 2의 중흥기를 이끌었던 영화작품들을 통칭하기 위해 만들어낸 범주, 소위 ‘문예 영화’라고도 불렸던 이 경향은 그 이름 자체에 이미 모순을 내포하고 있다. 당대 현실을 충실히 반영하려는 리얼리즘적 의지와 대사 및 영상을 통해 몽환적 분위기를 표현하려는 시적 소망은 쉽게 양립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크 프레베르, 앙리 장송 등의 시나리오 작가들과 장 가뱅, 루이 주베, 미셸 모르강 등의 명배우들을 탄생시켰던 이 경향은 한 시대를 풍미하면서 프랑스 영화의 황금기를 이루었다. 주로 거리를 작품의 무대로 삼음. 주변부 사람들의 불행한 인생역정을 보여줌. 사회에 만연한 온갖 부정적 요소들을 들추어 내고 비참한 실상을 그대로 보여줌.
프랑스의 시적 리얼리즘은 우선 독일에서 자국의 표현주의 영화에 반대하여 일어났던 ‘슈트라센 필름’(거리의 영화) 운동으로부터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다. 그 후, 1930년대에 들어 무성 영화로부터 유성 영화로 넘어가는 세계영화사의 흐름과 교묘히 맞아떨어지면서 커다란 발전을 보게 된다. 무엇보다도 문어체적이고 시적인 대사를 중요시하는 시적 리얼리즘의 영화들은, 배우의 발성연기와 대사의 묘미에 의존하는 초기 유성영화의 풍토에서 커다란 성공을 거둘 수 밖에 없었다.
시적 리얼리즘의 가장 대표적인 감독인 마르셀 카르네는 본래 시인으로 더 유명했던 프레베르와 손잡고 소위 프랑스 문예 영화의 시조가 되는 명작들을 만들어낸다(,,등).그리고 줄리앙 뒤비비에는 앙리 장송의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과 등을 발표하면서 옛 영화팬들의 기억에 추억의 명장면들을 새겨놓는다. 장비고는 시적 리얼리즘의 진수를 보여준 선구적 감독으로 등의 작품이 있고 장 르느와르는 시적리얼리즘의 영역을 확장한 감독으로 오숀 웰즈와 대비된다 프랑스 영화사상 가장 위대한 시네아스트 중 한명으로 평가 받는다.
3. 제 2차 세계 대전 발발 : 시적 리얼리즘 영화 쇠퇴.
그러나 전쟁은 다시 한번 프랑스 영화계를 주춤하게 만든다. 2차 대전을 기점으로 카르네, 그레미용, 뒤비비에 등 시적 리얼리즘계 작가들의 활동은 눈에 띄게 줄어들었고, 많은 영화인들이 미국으로 망명하여 퇴색의 길을 걷는데 1940년대 말까지 프랑스영화계 전반은 이렇다 할 작품을 내놓지 못한 채 부진한 상황을 면치 못한다. 1950년대에 들어서야 이러한 침체기가 회복되기 시작하는데, 장 가뱅, 미셸 시몽, 미셸 모르강 등의 배우들은 전쟁 전 시적 리얼리즘의 배우들 그대로였지만, 전면에 떠오르는 감독의 얼굴은 바뀐다. 앙리-조르주 클루조 , 클로드 오탕-라라(, 르네 클레망(등이 바로 이 새로운 감독들인데, 이들은 전 세대의 문예 영화의 전통을 그대로 이어받으면서 미국 헐리우드 영화의 스튜디오 제작 시스템을 동시에 수용하여 소위 ‘프랑스 품질 영화’들을 만들어낸다. 이후 이 감독들은 작가주의로 발전하게 된다.
4. 영화의 기술적 진보 -프랑스 품질 영화
전후 프랑스에서는 뒤비비에, 끌레르 오땅 라라, 카르네 등 1930년대 거장들이 다시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독일 점령기에 영화를 시작한 젊은 세대 영화 감독들은 그 수가 너무 적어서 그 때까지 그리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기 때문인데, 이브 알레그레, 로베르 브레쏭, 자끄베케르, 앙리 조루주 끌루조, 르네 끌레망 등을 신세대 감독의 대표 주자로 꼽을 수 있다. 1940년대 말 문학계의 격동적인 모습과 비교할 때, 고작 몇 편의 괜찮은 작품을 배출한 당시 프랑스 영화계는 우울하기 짝이 없는 상황이었다. 그 무렵 처음으로 개최된 칸 영화제에, 프랑스에서는 노엘 노엘의 , 장 들라느와의 , 크리스티앙 자끄의 , 르네 끌레망의 등을 선정했는데, ‘네오리얼리즘’경향의 에게 영광이 돌아간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한편 1946년에서 1949년 사이에는 로베르 데리, 노엘 노엘, 페르낭델과 같은 감독들이 만든 코믹한 내용의 오락 영화들이 인기를 누렸고, 탐정 영화의 경우에는 앙드레 원벨 감독의 초기 작품들이 겨우 눈에 띄는 정도였다가, 그 뒤 레미 코시몽과 에디 콩스탕틴 시리즈가 인기를 모으기도 했다. 당시 프랑스 영화는 인기 스타와 시나리오 작가에 의해 지배되고 있었다는 점 또한 중요한 특징중의 하나이다.
1950년대 중반 프랑스에서는, 전쟁 이전에 성공을 거둔 시적 리얼리즘의 기법들을 체계적으로 적용한 작품들을 ‘프랑스의 품질 영화’라고 지칭하고 있었다. 결국 이표현은 원래의 말뜻과 달리 과거의 미학을 수용한 작품들에 적용된 셈인데, 프랑스에서는 시적 리얼리즘의 영향력이 그만큼 강했던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화려한 영화 기법을 동원하여 당대의 스타들과 문학의 명작을 결합시킨 이 영화들은, 심리적 차원과 미학적 차원에서 정성 들여 가다듬음으로써 ‘스튜디오 영화 체제’의 황금기를 개화시켰으며, 시대 상황에 대한 비판도 병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