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 세계와 유대 기독교 세계의 충돌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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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이슬람 세계와 유대 기독교 세계의 충돌2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전쟁쪽에 초점을 마줄 경우 이슬람세계와 유대 기독교세계의 역사적 관계는 쇠와 쇠의 만남 같은 뜨거운 충돌의 관계로 엮어져 왔고 7세기 중엽이후 아랍계가 지중해 세계로의 쇄도로 인해 본격적으로 충돌한 이후 수차례에 걸쳐 충돌했다.
이슬람 제국은 시리아와 이집트를 정복하고 지중해를 자신들의 활동무대로 만들기 시작했다. 제해권을 한때 상실하기도 하였으나 비잔틴제국의 혼란을 틈타 북아프리카 전체를 점령하고 이베리아 반도를 정복하였다. 하지만 유럽으로의 진출을 하기위해 피레네 산맥을 넘는 일은 프랑크왕국과의 투르전투에서의 패함으로 실패하게 되었다. 비록 피레네 산맥을 넘지는 못하였지만 북아프리카와 이베리아반도를 장악한 이슬람제국은 지중해 연안으로 진출하여 노략질과 살육을 일삼았고 유럽의 기독교도들은 지중해를 더 이상 자신들의 바다로 여길 수가 없게 되었다. 이러한 이슬람의 지중해 장악을 벨기에의 경제사사가인 삐렌느테제는 유럽의 고대에서 중세로의 변환점으로 보았으며 그 이유를 지중해문화의 근본을 무너트린 것으로 이야기한다. 이처럼 이슬람세력의 지중해 진출은 서양역사 일대의 전화점이었고 후에 서양세력이 지중해를 되찾기 위해서 십자군 운동이라는 범 기독교 투쟁을 준비하게 하였다.
아랍세력이 지중해를 장악할 무렵에의 서양의 상황은 남으로는 아랍세력이 북으로는 노르만족의 침략이 압박하는 상황이었고 두 민족에 의해 유럽대륙은 완전히 갇혀 고대의 그리스 로마의 문화창조력도 거의 상실한 상태로 지중해세계의 힘의 구도는 완전히 바뀌어있었다. 결국 유럽대륙으로 후퇴한 유럽인들은 11세기 이슬람 세력을 응징하기 위해 십자군 운동을 발의하고 이슬람 세계로 쇄도해 들어간다.
2. 유럽 기독교세계의 대반격
유럽 기독교세계의 이슬람세력 응징은 10세기말 11세기 초에나 이르러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으로 안정되어 가며 이루어졌다. 이러한 활기를 되찾은 유럽 기독교세력은 성지를 탈환하고 지중해를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게 되었다. 유럽은 봉건제도의 영향으로 왕권이 약화되긴 하였으나 군주체제를 유지시켜 줌으로 총체적인 분열을 막았고 교황권의 신장과 더불어 교황청의 영향력도 성장해갔다. 이러한 유럽의 상황에서 교황 우르반 2세는 십자군운동을 통해 자신의 권위를 신장하고 기독교 세계를 통일하는 야망을 품었다. 마침내 셀주크 투르크가 새로운 이슬람제국을 창건하고 성지순례와 동방무역을 방해하고 예루살렘의 기독교를 박해하였으며 비잔틴제국의 군사적 원조 요청이 있게 됨으로써 십자군전쟁의 서막이 오르게 된다.
십자군원정은 8회에 달하였으나 그나마 성공한 것은 1차 십자군이었다. 1차 십자군은 무기와 기율을 어느 정도 갖춘 원정군이었고 비교적 잘 통일된 모습을 보였으며 성지를 탈환하여 예루살렘왕국을 세우기도 하였으나 유럽으로 귀환한 뒤 예루살렘왕국은 무너졌다. 2차 십자군은 거의 전멸하다시피 실패하였으며 3차 십자군은 살라딘의 공격으로 예루살렘이 함락되자 영국과 독일 프랑스의 군주들이 참여하였으나 살라딘과의 조약을 맺고 기독교도의 예루살렘 자유왕래만을 보장받는 등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강력한 교황권을 자랑한 인노켄티우스 3세가 발의한 4차 십자군은 상업적 이익과 동지중해 교역로 확보에만 관심이 있어 비잔틴제국을 노략질하는 등 가장 추악한 십자군이었다. 5차 십자군은 다미엣타를 점령하였으나 나일강의 범람으로 후퇴하고 곧 다미엣타를 빼앗겼다. 6차 십자군은 프리드리히 2세가 주도하였는데 외교를 통해서 예루살렘의 대부분을 회복하였고 10년 동안의 휴전을 성사시켰지만 프리드리히 2세는 파문당하였다. 7차 십자군은 1244년에 다시 예루살렘을 빼앗긴 이후 다미엣타를 공격하지만 성왕 루이는 포로가되고 막대한 배상금을 물었으며 별다른 전과를 거두지 못했다. 8차 십자군역시 성왕 루이가 주도하였으나 병사하고 이슬람 교도의 보복으로 기독교인이 학살되고 십자군 원정도 막을 내리게 되었다. 이중에 4회 십자군의 8년후에 소년소녀 십자군이 있었는데 대부분 사망하거나 노예로 팔렸다.
십자군에 대한 평가는 인명 에너지 시간 자원의 무익한 낭비를하고 중동지역의 회복은 커녕 종교적 불관용과 박해를 더욱 자극하고 동유럽의 기독교도들을 더 큰 곤경에 빠트렸고 물질적 세속적으로 점차 변해갔다는 부정적인 평가와 이상주의 신앙 영웅주의의 발현으로 정치 경제 문화등 여러면에서 서구의 진보를 촉진시켰다는 긍정적인 평가로 나뉘어진다.
십자군원정을 통해서 아랍의 지적 문화적 창조력이 서양 문화로 옮겨가고 이를 통해 서양은 1백년 후에 이탈리아를 필두로 르네상스 문화를 발전시키게되었다.
3. 이슬람세계의 재공격
셀주크 투르크에 이어 오스만 투르크 제국은 비잔틴 제국을 정복하고 15세기 중엽에 다시 동유럽의 기독교 세계를 제압하게 된다. 당시의 비잔틴 제국은 북으로는 불가리아인과 슬라브족과의 전쟁 그리고 7세기 이래 이슬람제국, 셀주크 투르크와의 전쟁에 시달리면서도 허약해진 상태로 오랜 기간을 버티고 있었다. 그러나 경제적 침체와 정치적 불안정에 불만을 품은 그리스계 주민들이 소아시아 지역으로 진출한 오스만 투르크족의 편에 서게 되고 굴욕적인 조약으로 연명하다가 1453년 두 달간을 버텼으나 결국 5월 29일 비잔티움은 함락되고 황제 콘스탄티노스 11세는 용감히 싸우다 전사하게 된다. 일부 시민은 베네치아와 제노바의 함선으로 피신하지만 대부분의 시민은 피살되었다. 투르크의 관행대로 3일간의 약탈이 자행되었고 성소피아 성당의 제단을 파괴하고 강압적으로 비잔틴 황제의 계승자가 되고 비잔티움을 이스탄불로 개칭 수도로 삼았다. 비잔티움을 함락한 이후 오스만 투르크 제국은 발칸반도 대부분을 장악하였고 오스만의 역사에서 대제로 불리 우는 술레이만은 오스트리아의 빈을 포위하기까지 하였으며 지중해에서도 힘을 과시하였다.
4 가톨릭교 신성동맹의 오스만 투르크제국 응징
오스만 투르크의 급속한 성장은 유럽 기독교 세력에게 더할 수 없는 낭패감과 위기감을 주게 되었고 16,17세기의 유럽은 마르틴 루터와 쟝 칼뱅의 종교개혁으로 인하여 대립과 혼란에 빠져있었다. 유럽의 기독교 국가들은 신교도와 구교도의 대립과 싸움으로 심각한 정치적 사회적 혼란을 겪어야 했고 신교국가와 구교국가로 분열하여 대립하다 30년 전쟁을 치렀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황 피우스 5세는 칼뱅파 신교의 세력이 현저히 확대되고 가톨릭교의 교세가 날로 위축되어가자 교황청, 스페인, 베네치아의 방어-공격동맹인 신성동맹을 결성하고 동지중해 서지중해 가릴 것 없이 투르크해군과 부딪치는 곳에서 싸울 것에 합의 하였다. 신성동맹군과 오스만 투르크 함대는 레판도해에서 해전을 치르게 되는데 신성동맹군 측의 완전한 승리로 장식하게 되었다. 이후 신성동맹군은 내분으로 인해 무산되었고 교황은 1572년 타계하였다. 신성동맹군이 오스만 투르크 함대를 무찌른 레판토 해전은 이익은 크지 않았지만 심리적 도덕적 의미는 매우 컷으며 이슬람 세계에 대한 유럽 카톨릭교세계의 대승리로 기록이 되었고 기독교세계의 대의를 드높였다. 이후 기독교세계는 투르크족에 대한 공포에서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었다. 반면에 오스만 제국은 내부의 대립이 격화되어 왕성한 팽창력은 보여주지 않았지만 레판토 해전으로 인해 쇠약해 진 것은 아니었다. 오스만 투르크제국에 큰 타격을 준 것은 바로 페르시아의 도전이었으며 19세기 초까지 페르시아는 오스만 투르크 제국을 압박하였고 그로 인하여 오스만 제국의 대(對) 유럽 정책은 적지 않은 제약을 받고 쇠약해졌다. 그리고 1차 대전에 참전하여 패한 뒤 해체되어 현재의 터키가 되었다.
5. 이슬람세계와 기독교세계의 발칸반도에서의 재(再)격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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