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동적 안락사와 수동적 안락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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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능동적 안락사와 수동적 안락사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능동적 안락사와 수동적 안락사의 전통적 구별은 비판적 분석을 필요로 한다. 통상적인 견해는 수동적 안락사가 허용될 때가 있는데 비해 능동적 안락사는 항상 금지된다는 중요한 도덕적인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몇 가지 근거를 들어 이 견해를 반박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능동적 안락사는 많은 경우 수동적 안락사보다 더 인도적이다. 둘째 이 견해는 무관한 근거들에서 생사가 걸린 결정들로 이어진다. 셋째 이 견해는 살인과 사망방조를 구별하지만, 그 구별은 그 자체로는 도덕적 의미가 없다. 넷째 이 견해를 따르는 일반적인 주장들은 타당하지 않다. 따라서 나는 이 설을 따르는 미국의학협회의 정관성명서가 건전하지 못하다고 본다.
의료윤리학은 능동적 안락사와 수동적 안락사를 구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일부 사례에서는 치료를 중단하고 환자가 죽도록 해주는 것이 허용될 수 있으나, 환자를 죽일 의도로 직접적인 행동을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대다수 의사들이 이런 태도를 받아들이는 듯하며, 1973년 12월 4일, 미국의료협회(AMA)의 대표자회의에서 채택된 성명서도 이를 확인한다.
타인이 한 인간의 목숨을 의도적으로 중단시키는 행위, 곧 안락사는 의료직업의 본분과 반대되고 미국의료협회의 정관하고도 반대된다.
생물학적 죽음이 임박했다는 명백한 증거가 있을 때 육체의 생명을 연장하기 위한 이례적 수단의 사용을 중지하는 것은 환자와/나 직계 가족이 결정할 일이다. 환자와/나 환자의 직계가족은 의사의 충고와 판단을 자유롭게 참고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 견해는 강력한 반대의 소지를 담고 있다. 앞으로 나는 관련된 주장들 몇 가지를 제기하고 의사들에게 이 문제를 다시 보라고 종용할 것이다.
우선 친숙한 사례로 상태가 호전될 가망도 없이 끔찍한 고통을 겪는 불치의 후두암 환자를 들어보자. 현재의 치료를 계속해도 살날이 며칠 남지 않은데다가, 고통을 견딜 수 없어서 그는 그 며칠을 더 살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그는 의사에게 고통을 끝내달라고 요구하고, 그의 가족도 그 요구에 동조한다.
의사가 통념적 견해를 좇아 치료 중단에 동의한다고 생각해보자. 의사가 치료를 중단하는 근거는 환자가 끔찍한 고통에 시달리고 있고, 어쨌든 죽을 게 뻔한데 쓸데없이 고통을 연장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해보자. 치료를 중단하기만 하면 환자의 사망 시간을 연장하여 보다 직접적 행동으로 치명적 주사를 맞을 때보다 더 오래 고통을 겪게 할 수도 있다. 이 사실은 일단 환자의 고통을 연장하지 않겠다는 결정이 내려지면 능동적 안락사가 실재로 수동적 안락사보다 더 바람직할 수 있다고 볼 강력한 근거가 된다. 그렇지 않다면 고통을 줄이기보다 늘이는 대안을 인정하는 것이며 무엇보다 그의 목숨을 연장하지 않겠다고 결정한 동기였던 인도적 충동과 반대된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취지는 “죽을 허락을” 받는 과정은 상대적으로 느리고 고통스럽지만 치명적 주사를 맞는 것은 상대적으로 빠르고 고통이 적다는 것이다. 다른 예를 들어보자. 미국에서 600명에서 한 명 정도는 다운증후군을 안고 태어난다. 그 아기들은 대개 그것만 제외하면 건강하고, 통상적인 소아과적 간호만 받는다면 그들은 그것 빼고는 정상적인 유아기를 맞을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일부는 장기폐색과 같은 선천성 장애도 있어서 수술을 해야 살 수 있다. 부모와 의사가 수술을 하지 않아 아기를 죽게 할 때도 있을 것이다. 앤터니 쇼(Anthony Shaw)는 그럴 경우 어떻게 되는지 묘사한다.
수술이 거부되면 [의사는] 자연력이 아기의 목숨을 가져가는 동안 아기를 고통에서 지키려고 노력해야만 한다. 죽음을 물리치기 위해 수술도를 드는 것이 자연스런 기질인 의사로서 방관한 채 구할 수도 있는 아기가 죽는 것을 지켜보는 것은 내가 아는 한 정서적으로 가장 힘겨운 경험이다. 학술회의에서, 이론적인 토론에서, 그런 아기들을 죽도록 방치하자고 결정하기는 쉽다. 소아병동에서 방관한 채 탈수와 감염이 몇 시간 며칠에 걸쳐 자그마한 생명체를 시들게 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은 전혀 다르다. 그것은 나와 병원직원들에게는 병실에 출입할 수 없는 부모가 겪는 것보다도 훨씬 더 심한 고문이었다.
안락사라면 모두 반대하고 그런 아기들을 살려야만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는 이유는 이해할 수 있다. 그런 아기들이 빠르고 고통 없이 죽는 게 낫다는 사람들이 있는 이유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도대체 왜 “탈수와 감염이 몇 시간이나 며칠에 걸쳐 한 작은 생명체를 시들게 내버려둬야” 한다는 사람들이 있어야 되는가? 아기는 탈수되고 시들 수 있어야 하지만 고통 없이 그 생명을 끝낼 주사를 놓으면 안 된다는 주장은 너무도 잔인해서 굳이 반박할 필요도 없어 보인다. 강한 언어란 공격의도를 담은 것보다 골자를 가능한 한 가장 분명하게 표현하는 것이다.
나의 두 번째 요지는 그런 통상적 견해가 관계도 없는 근거들을 내세워 생사를 결정한다는 것이다.
다운증후군을 안고 태어나서 그 증후군과 무관한 선천성 장애들 때문에 수술을 해야 살 수 있는 아기들의 경우를 다시 생각해보자. 수술을 안 해서 아기가 죽을 때가 있는데, 그런 결함이 없다면 그 아기는 살아남는다. 그런데 장기폐색을 고치는 수술은 그리 어렵지 않다. 이 사례들에서 그런 쉬운 수술이 시행되지 않는 것은 분명히 아기가 다운증후군 환자고 부모와 의사가 그런 사실 때문에 아기가 죽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아기들의 삶과 가능성을 어떻게 보든 이런 상황은 불합리하다는 점을 명심하자. 그런 아기의 목숨이 구할 가치가 있다면 간단한 수술을 받는 것은 아무런 문제도 아닐 것이다. 또는 그런 아기가 살지 않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한다면, 장기가 막히지 않았다고 해도 아무런 차이도 없을 것이다. 어떤 경우든 생사의 문제는 무관한 근거들에 따라 결정된다. 문제는 다운증후군이지 장기가 아니다. 이 문제는 그런 근거에서 결정돼야지 장기가 막혔는가 안 막혔는가 하는 근본적으로 상관이 없는 문제에 근거해서는 안 된다.
물론 장기가 막히면 “아기의 죽음을 방조할 수” 있다는 생각이 이런 상황을 가능하게 하지만, 그런 결함이 없으면 아기를 “죽이면” 안 되므로 어떤 일도 하면 안 된다. 이 생각 때문에 무관한 근거들을 토대로 생사가 결정된다는 사실도 이런 통념이 거부돼야 하는 좋은 이유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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