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신종교 창가학회 창가학회와 재일 한국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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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신종교 창가학회 창가학회와 재일 한국인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조성윤, 2016, 「헐거운 브레이크 : 창가학회와 공명당의 관계」, 『종교문화비평』 Vol. 29
가마쿠라 시대의 승려 니치렌이 인도와 중국에서 받아들인 불교 경전과 풀이를 재해석한 교리를 바탕으로 일련정종(一連正宗)이 만들어졌다. 니치렌은 기존의 불교 지도자들을 비판하고 새로운 방식의 불교를 만들어가야 한다고 설파했다. 그는 대승불교의 한 종파인 천태종을 계승하였으며, 불교 경전 가운데 묘법연화경(법화경)이 가장 중요한 진리를 담고 있다고 보았다. 그러면서 내세 극락정토를 염원하며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을 염불하라고 가르치는 기존의 염불종은 민중이 현실의 혼란과 괴로움을 정해진 숙명으로 여기게 만든다고 비판하였다. 즉 기존의 지배층을 위한 종파, 현실을 외면하고 죽은 뒤의 구원을 강조하는 종파를 모두 비판하고 불교의 개혁을 주장했던 것이다.
니치렌은 시주를 많이 한다고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특히 서사행 대신 법화경의 가르침을 익히고 실천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가르쳤다. 또한 평소에 끊임없이 ‘남묘호렌게쿄’라는 주문을 암송하라고 강조했다. ‘사람은 누구나 불성(佛性)을 지니고 있으므로 스스로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므로 숭배 대상이었던 불상(佛像)을 치우라.’고 하였다. 불상이라는 눈에 보이는 대상물을 진짜 부처로 착각하고, 지나치게 의존하고 공을 들이는 당시 불교 신앙의 잘못된 문화를 바로잡으려는 뜻이었다. 그 대신 ‘남묘호렌게쿄’라고 적은 만다라를 주면서 불상 대신 그 앞에서 수행을 하라고 가르쳤다. 이 만다라를 일련정종에서는 본존(本尊)이라고 부른다.
창가학회는 이러한 불교 교단인 일련정종(一連正宗)의 신도단체로 출발했다. 마기구치 쓰네사부로가 그 창시자이며, 그의 제자 도다 조세이로 이어졌다. 그들을 포함하여 창가학회의 전신인 창가교육학회 간부 19명은 모두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투옥된다. 이를 통하여 창가교육학회는 일본 군국주의에 저항했던 몇 안되는 종교단체로 남게 되었다.
창가학회로 이름을 바꾸면서 이 조직을 재건한 도다 조세이는 ‘생명론’의 깨달음을 얻는다. ‘우주의 궁극적인 진리의 실체가 무엇인가’를 두고 생각을 거듭하던 그는, 진리는 바로 삼라만상에 편재하는 생명이고 그 생명이 자신의 생명과 맞닿아 있다는 것을 강하게 체험하였다. 그는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남묘호렌게쿄를 입으로 소리 내어 외우는, 즉 창제(唱題)를 하는 과정에서 우주의 생명, 동식물의 생명과 공명(共鳴)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전후 일본의 폐허 속에서 생명의 꽃을 피우기 위하여 조직적인 운동을 전개한 것이다. 1960~70년대를 거치면서 신도 700만 명 규모의 종교단체로 성장한 창가학회는 대체로 도시 하층민, 자영업자 계층이 중심을 이루었다.
창가학회의 발생과 성장 과정을 보면 카톨릭에서 신교가 발생하는 것과 유사한 양상을 발견할 수 있다. 중세시대에서 근대로 넘어오는 과정의 유사함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지배계층에만 한정된 종교와 그것으로 인하여 종교가 권력을 형성하던 시대에서, 종교가 민중의 것으로 전환되는 과정을 거치는 것이 그러하다. 또한 창가학회가 신앙적 근거로 삼은 법화경이 현세 중심적이라는 것이 큰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하층민 중심의 신도 구성과 시주나 헌금으로서의 수양이 아니라 ‘근행’과 ‘창제’라는 개인적 수양을 중심으로 하는 의례의 구성방식 또한 개혁적인 흐름 속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좌담회’라는 주요 종교활동은 당연히 이와 연관된다 할 수 있다. 종교지도자가 중심이 되는 단위가 아니라 평신도가 중심이 되어 모임이 구성되고 진행되어지는 것까지 종교의 교리와 의례의 방식이 통일되어 있다고 보여진다.
창가학회에 대한 이해는 왜 창가학회 내에 재일한국인이 그렇게 많이 흡수될 수 있었는지에 대한 답을 보여준다. ‘조선적(朝鮮籍)’이라는 말을 알게 된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말이 가지고 있는 역사적 의미를 생각하면 참으로 가슴이 아프다. 또한 재일한국인 형성 과정에 43이 절대 작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 또한 알 수 있었다. 어느새 재일한국인은 3세까지 이어지고 있으나 남한이나 북한 모두 그들에 대해 아무런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 상황은 여전하다. 본명과 통명 사이에서, 남한북한일본 그 어느 곳에서도 온전한 고향을 갖고 있지 못한 재일한국인들에게 내밀어진 ‘종교적 구원’의 손길이 창가학회였을 것이란 짐작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 대부분 가난했고 사회적인 차별을 받았으며 그러므로 질병에 있어서도 보호받지 못하는 집단이었던 재일한국인이 아무런 차별 없이 오직 종교적 차원에서만 건네지던 손길을 뿌리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도 가난과 질병에서 현실적으로 구제될 수 있다는 믿음을 스스로 체험한 지인들의 손길이었기 때문에 더욱 가능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일본 식민지를 지내온 한국인으로서 일본인의 종교를 받아들인다는 것과 일본 사회 내에서도 부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는 창가학회에 대한 사회적 터부는 그들이 처한 처지를 넘어설 만큼의 가치는 아니었던 것이다. ‘현재의 복지가 민족 정체성보다 훨씬 중요하고 긴박한 것’이었으며, ‘창가학회 신도가 되면 조직 내에서는 민족적 차별을 느끼지 못했고, 오히려 자신의 어려움을 이해해주고 위로해주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는 재일한국인인들의 증언은 당시 그들이 처한 어려움에 다시 한번 안타까움을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
창가학회와 공명당의 관계 혹은 존재 또한 흥미롭다. 종교의 원리를 정치 차원에서 실현하고자 설립된, 수단으로서의 종교정당인 공명당은 현세에서의 민중의 삶을 구도하고자 했던 종교이론을 정확히 그 근거로 삼고 있다. 또한 ‘중세의 방식으로는 불가능하다. 위로부터 아래로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방식이 아니라 광선유포를 통해서 대중의 마음 속에 불법의 진리를 심어주어야 한다. 동시에 진정한 민중의 대표들을 의원으로 당선시켜 국회에 보내 민중을 위한 정책을 펴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한 도다 조세이의 입장은 상당히 진보적이었다.
1964년 창당한 공명당의 강령 강령 ; 1. 세계(지구) 민족주의에 의한 세계평화 실현
2. 인간성 사회주의에 의한 대중복지 실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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