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 압구정동의 공간의 이미지와 정당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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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공간] 압구정동의 공간의 이미지와 정당성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①서론
②압구정동의 역사와 유래
③공간의 분석
④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요소
⑤공간에 대해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인식
⑥압구정동의 이미지의 변화
⑦압구정동의 이미지가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
⑧압구정동의 이미지가 갖는 정당성 평가
⑨결론
본문내용
조선조 세조 때의 권신 한명회가 지금의 현대APT 76동 위치의 강언덕에 그의 호인 '갈매기와 친하다'는 뜻의 압구정이라는 정자를 짓고 한가롭게 지냈다는 고사에서 유래되어 압구정동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한명회(韓明澮,1415~1487)는 수양대권을 도와 계유정란의 일등공신이 된 뒤 성종 대에 이르기까지 수십 년 동안 고위 관직을 지낸 인물로 무려 30여 년 동안 권력의 중심에 자리했던 인물이다. 주도면밀하게 세류를 파악했던 그였지만 관직을 떠난 뒤에도 다시 임금의 부름을 받기 위해 서울에서 멀지 않은 지금의 압구정동 자리에 정자를 짓고 머물렀으니, 수양대군을 도와 ‘킹 메이커’의 역할을 다했던 그도 자신의 권력욕만큼은 어쩔 수 없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또 한켠으로 생각하면 그 당시 사대문 안이라는 것이 지금 우리가 생각하듯이 유연한 것이 아니었다고 할 때 한강 건너에 자리를 잡고 물러나 있던 그의 행적이 과히 흉이 될 법한 일은 아니다 싶다. 따지고 보면 화전에 머물렀던 중신들도 많고 서울에선 좀 멀지만 파주에 자리를 잡고 있었던 사람들도 많았다고 볼 때 한명회가 특히 비난을 받은 것은 순전히 그의 정치력을 위험시했던 사람들에 의한 비난성 발언에 가까운 야유였을 것이다.
그러나 압구정이란 이름은 한강변에 있는 이 정자의 장소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 아니다. 원래 '압구'는 한명회의 호이다. 중국 송나라 재상이었던 한기(韓琦)가 만년에 정계에서 물러나 한가롭게 지내던 서재 이름인 압구정에서 따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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