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황석영 인물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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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작가 황석영 인물분석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작가 황석영은 70년대 한국문학에서 독특한 이정표를 세워놓은 작가라고 할 수 있다.
작품에는 한 작가의 문체와 함께 그 작가의 체질이 있는데 그 또한 껄껄하고 씩씩한 남성적인 모습이 보여 진다. 작품에서 보면 상황과의 부딪침에서 한발도 뒤로 물러서지 않으려는 작가의식을 느낄 수 있다. 그 작가의식은 그의 문학이 행동적이고 사실주의적 수법으로 전개한다. 그의 여러 작품들은 대중과 영합하는 말초적 감각도 아니고 예술 지상주의적 미문 의식도 아니다.
그의 소설을 대할 때 읽는 이는 처음에는 무덤덤하게 또는 약간 지루한 듯 차분히 읽어 들어가게 된다. 그러다가 소설이 진전되어 나가는 과정에서는 거친 말과 욕설 또는 칙칙하고 추하고 눈살이 찌푸려질 정도로 고통스러운 장면이 스스럼없이 제시되기도 한다.
황석영은 ‘객지’, ‘삼포가는 길’ 그리고 ‘장길산’ 등의 작품으로 한국문학사에 뚜렷한 궤적을 남긴 작가이다. 초기에는 대체로 탐미주의적인 경향의 작품을 많이 발표했으나 ‘객지’를 발표하면서부터 리얼리즘에 바탕을 둔 민중적인 현실묘사의 작품을 주로 창작하였다. 그의 소설은 1970년대 초반 이후의 사회적 상황에 대해 예리하면서도 객관적인 시선과 강한 문제의식을 보여주는 점이 주요한 특징이다. 유신정권의 개발우선 정책과 산업화·근대화의 파행적 전개 등이 황석영의 투철한 시대의식과 맞부딪침으로써 그의 소설을 더욱 문제적인 작품으로 이끌고 간 것이다. 특히, ‘객지’와 ‘삼포가는 길’은 도시화와 산업화 우선의 개발정책이 야기한 이농현상과 농촌의 붕괴현상 등 당시 사회적 모순의 핵심을 꿰뚫고 있는 작품이다.
황석영 소설의 특징과 형태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인간의지와 현실과 역사의식에 바탕을 둔 건강한 리얼리즘의 세계이다. 그의 소설에 살아있는 리얼리즘은 아마도 그의 문학이 체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황석영 그 역시도 자신의 작품이 개인적 체험에 기인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따라서 그의 삶을 살피는 것은 작품 고찰에 앞서 매우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라고 생각된다. 우선 그의 삶을 알아보고 그의 주요작품을 통해 황석영의 작품세계를 이해해 보자.
2. 생애
1) 삶
황석영(본명 황수영)은 1943년 1월 4일 만주 장춘 대동대가에서 아버지 황기연과 어머니 전경도 사이의 4남매 중 장남으로 출생했다. 1945년 해방과 함께 모친의 고향 평양으로 이주하였다가, 이듬해 봄 전적지인 황해도 신천군으로 옮겼다. 1949년 38선을 넘어 월남하여 영등포에 정착하였다.
어려서 625를 보았고 고등학생 때 419 혁명과 516 군사 쿠데타를 겪었고 대학 시절엔 63 사태까지 겪으면서 베트남 전쟁에 끌려갔다. 제대하고 돌아와서 문단에 복귀하면서부터 유신 독재와 싸워야 했으며 공장과 농촌 현장에서 일하면서 전라도 해남과 광주에 머물며 전국적인 현장운동에 참가했다. 광주 항쟁을 거치고 나서 베를린에서 열린 제3세계 문화제에 갔다가 독일, 미국, 일본 등지에서 문화운동 조직을 만들면서 해외 운동권 인사들과 연결되었으며 이러한 인연을 바탕으로 범민족대회와 범민련운동의 일환으로 방북과 망명, 그리고 투옥을 겪었다. 정말로 다른 사람들은 한번 겪어보기 힘들었을 일들을 오 십여년 반세기동안 그는 다 겪은 것이다. 하지만 이런 그의 삶이 있었기에 지금의 황석영이 있다는 생각을 해 본다. 그 역시 이러한 삶들이 자기의 팔자라고 말하며 지금은 담담해 보였다. 그는 지금도 동아 일보에 연재하는『오래된 정원』과『손님』이라는 소설을 쓰면서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그는 문학이란 사람의 삶을 다루는 기본적인 일이라고 말하며, 자신이 글 쓰는 일을 “봉사활동의 시간”이라고 표현함으로 이 시간이 끝나면 서울을 떠나 편안한 휴식을 갖고 싶다고 말한다.
황석영은 일찍이 홀어머니 밑에서 성장하였다. 그래서 어린 시절에는 모친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모친(母親)은 평양에서 일찍 개화한 집안에서 태어났는데, 모친의 조부는 31운동과 신사참배 반대운동으로 일제 치하에서 모두 합하여 7년 간 옥살이를 하신 목사이시며, 동시에 학교 창설자이셨다. 이러한 조부의 영향으로 대학을 졸업한 언니와 동생이 독립운동을 하였는데 후에 모두 만주로 도피를 했다고 한다. 이처럼 그의 어머님 집안은 당시 말로 소위 인텔리라 불리는 지식인 집안이었으며, 독립운동가 집안이었다. 이러한 모친의 영향으로 황석영은 월남을 한 이후에도 책읽기를 소홀히 하지 않게 되었으며, 꾸준히 독서력이 쌓이다 보니 초등학교 때부터 어렴풋이 작가가 될 결심을 하였고, 개인적으로는 어렴풋하게 나마 일제잔재청산에 대한 문제의식을 품었다고 한다.
유년시절을 보낸 후 그는 고등학교 시절에 419혁명과 516군사 쿠데타를 겪었으며, 대학시절에 63사태를 겪게 된다. 그 후, 1966년 뒤늦게 해병대에 자원입대를 하게 되는데 ― 해병대에 자원입대 하게 된 것은 정말 단순하게도 게으름으로 인한 징병검사의 여러 차례 연기로 인해 경찰서에 잡혀가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 입대 이듬해에 특수전 교육을 받고 베트남으로 파병을 하게 된다. 이러한 경험은 황석영의 작품 『무기의 그늘』에 바탕이 되는데 그는 이 정글의 시간 속에서 자신이 상상하지도 못했던 미국의 본질이라든가 전쟁의 성격을 눈치채기 시작했다고 한다. 당시에 전쟁터에 끌려나온 이들은 사회적으로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이 대부분이었는데 ― 전쟁참여자 중 행여나 도시에서 자라 교육을 조금이라도 받은 사람들은 차출되었다하더라도 참전과 동시에 모두 후방으로 다 빠졌다 ― 이들은 한국군으로 왔지만 미군의 지휘 속에서 더러운 전쟁터에서도 소위 “3D”라 할 수 있는 소부대 단위의 매복수색작전을 담당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한국군은 많은 인명을 살상하게 되었다고 한다. 베트남의 “라이따이한” 문제라든가 “양민학살”의 문제는 이러한 배경을 통해 형성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문제는 많은 물량을 투입하는 폭탄투하작전 같은 것은 많은 인명과 구조물을 살상파괴하기는 하지만, 소규모 게릴라전과 같은 국지전은 상호 대면 상태에서 살상과 약탈이 자행되기에 민족감정이나 동료에 대한 복수심이 유발되어 전후에도 서로간에 인간적인 증오심과 모멸감을 남긴다는데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