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돌의 역사2 레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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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무함마드에 의해서 창시된 이슬람교는 아라비아 반도를 중심으로 나라를 건립하여 비잔틴 제국을 공격하여 알렉산드리아를 640년에 차지한 것뿐만 아니라, 732년에는 페레네 산맥을 넘어 유럽대륙을 공격하기 까지 유럽세계와의 충돌은 지속적으로 진행되었다. 이슬람제국이 시리아와 이집트, 그리고 이베리아반도를 차지하게 됨으로 지중해의 중심세력으로 부상했을 뿐만 아니라 교역을 통하여 수준 높은 문명을 받아들이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이슬람 제국은 수세기에 걸친 사산조 페르시아와의 전투로 인해 세력이 약해진 비잔틴 제국으로 인하여 비교적 쉽게 시리아와 이집트를 수중에 넣게 되었다. 이 두 지역은 비잔틴 제국 시기에 기독교를 믿는 지역이었지만 단성론(그리스도를 ‘완전한 신’ 혹은 ‘완전한 인간’이라고 주장)을 주장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공의회에 의해서 단성론을 믿는 사람을 이단으로 규정하여 핍박을 주었다. 이러한 환경에서 이슬람 제국은 이들에게 종교적 관용을 배품으로 적대적인 감정을 없앴으며 오히려 이 지역의 기독교도들은 이슬람 세력을 해방 세력으로 맞이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온다. 이러한 정책은 이슬람 제국의 영역 확장에서 중대한 역할을 하여 원주민들의 환영과 훗날 개종으로 이어지는 계기를 마련하게 해주었다. 그러나 시리아와 이집트를 차지한 이슬람 제국은 비잔틴 제국의 공격을 받게 된다. 645년 해전에 익숙하지 않은 아랍군은 비잔틴 제국에 패하게 되어 알렉산드리아를 빼앗기게 된다. 이후 시리아와 이집트를 사이에 두고 여러 전투가 있었는데, 673년 마르마라 해에서의 전투는 이슬람 제국의 제해권을 상실하게 된 전투이다. 잠시 제해권을 상실한 이슬람 제국은 우마이야조 시대에 아프리카로의 진격을 적극적으로 펼치게 되어 698년 카르타고를 점령하는 결과를 낳게 되어 북아프리카에서 이집트, 시리아, 튀니스를 기지로 삼은 북아프리카함대를 소유하게 되어 지중해에서 입지를 다시 강화 시키게 되었다.
북아프리카를 장악한 이슬람제국은 이베리아반도를 정복하기 위해 711년 베르베르족으로 구성된 7천여 명의 군사를 지브롤터해협으로 파견한다. 이때 당시 이베리아반도는 서고트왕국이 왕위를 둘러싸고 내분에 빠져 있었다. 서고트족에 저항하고 있던 이베리아반도의 원주민 켈트족과 종교적 박해를 받던 유대인이 이슬람군대를 환영하여 이베리아반도를 손쉽게 수중에 넣게 되었다. 이슬람 군대는 이베리아 반도에 그치지 않고 프랑크 왕국이 있는 피레네 산맥 북쪽 지역에 진격하게 된다. 하지만 프랑크 왕국은 서양 역사상 처음으로 보병과 중무장 기병을 출전 시켜 이슬람 군대를 피레네산맥 남쪽으로 후퇴시켰다. 피레네 산맥 이남 지방은 이후 6700여년의 기간 동안 이슬람의 지배를 받게 되어 이슬람의 문화와 기존의 기독교 문화가 혼재된 문화를 낳게 된다.
제 2장 유럽 기독교세계의 대반격
기독교 세계의 대반격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십자군 전쟁이다. 로마의 멸망 이후 정치, 경제의 불안정으로 인하여 이슬람 세계를 공략하지 못했지만, 중세 서양 사회의 10~11세기 초에 이르러 상당한 성장을 이룩함으로 성지 탈환과 지중해를 되찾기 위한 운동을 벌여나가게 되었다. 그리고 유럽을 하나의 구심점으로 통치할 정도의 교황권이 성장함으로 유럽 사회는 이슬람세력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교황 우르반 2세는 십자군 발의를 통하여 그리스정교회와 로마카톨릭교회의 통합하는 원대한 꿈을 십자군에 반영하였다. 교황은 1095년 클레르몽에서 종교 회의를 열고 예루살렘 순례자들의 고난과 비잔틴 제국의 원군요청을 들어 십자군 원정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리고 신을 위해 싸우다 전사하는 자에게는 용서와 구원을 약속했다. 그를 지지한 청중들은 “신은 그것을 원하신다."고 외치며 십자가를 자신의 옷에 붙이며 전쟁에 참여하게 된다.
십자군 전쟁은 1차에서 8차까지 진행되었는데 성공이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은 1회 십자군뿐이었었다. 1회 십자군은 영국과 프랑스 국왕의 동생들, 로렌공 갇프리와 그의 동생 볼드윈, 툴루즈백 레이몽, 남이탈리아 출신의 보에몽 등이 참가한 십자군은 무기와 기율을 어느 정도 갖춘 원정군이었다. 1097년 5월에 십자군 주력 부대는 니케아를 함락 시켰다. 그들은 안티오키아로 향하고 볼드윈은 유프라테스 강 유역의 고대도시이며 시리아 방어의 요충지인 에데사를 점령하고 십자군 국가의 영주가 되었다. 안티오키아로 향한 십자군 주력 부대는 7개월간의 공격으로 안티오키아를 점령하고 제2의 십자군 국가를 건설한다. 1099년 7월에는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성지 탈환을 성공적으로 마치게 된다. 그리고 툴루주백 레이몽은 안티오키아와 예루살렘의 중간의 트리폴리를 중심으로 4번째 십자군 국가를 건설했다. 하지만 십자군이 유럽으로 귀환한 뒤에는 예루살렘왕국마저 무너졌다.
시리아와 이집트의 지배자인 살라딘이 예루살렘을 점령하게 되자 기독교세계는 다시 거병하게 되고 이는 제3차 십자군 원정이다. 영국의 사자심왕 리처드 1세, 프랑스의 필리프 존엄왕, 독일 프리드리히 1세등 유럽을 대표하는 군주들이 참가 했지만 영국군과 프랑스군은 서로의 실수를 바라는 등 역시 좋지 못한 성과를 거두었다. 그들의 결실은 단지 살라딘과의 협정을 통하여 기독교도의 예루살렘 자유왕래를 보장 받은 것뿐이었다. 유럽을 대표하는 나라가 참여했다고 하지만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하고 십자군 전쟁 철수 이후에 서로를 적으로 만들게 되었다.
제4회 십자군은 추악한 십자군으로 기록 되었다. 성지탈환의 목적은 사라지고 약탈과 파괴로 인하여 이슬람 세력과 기독교 세력의 완충역할을 하였던 비잔틴 제국을 라틴제국, 테살로니카 왕국, 아테네공국, 아케아 공국 등으로 분열 시켰다.
이후에 5~8회까지의 십자군 전쟁은 있었지만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하고 십자군 원정의 막을 내리게 된다.
십자군 전쟁은 동서양이 만나는 계기가 되었다. 원정대는 이슬람의 발달된 문화를 가져와서 1백여 년 후에 이탈리아를 필두로 르네상스문화를 발전 시켰다. 하지만 이러한 문화적인 발전 외의는 십자군 전쟁이 대부분 혹평이 가해지는데 그들이 외쳤던 성전의 회복을 제대로 시행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전쟁 기간 중에 악행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고대 시대의 전쟁일수록 전쟁 후 수탈이 많이 나타나기는 하지만 기독교의 신앙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 그들의 행동이 선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러한 지적들이 나오는 것 같다. 십자군 전쟁 이후 셀주크 투르트족은 쇠망해 갔고 훗날 오스만 투르크의 등장을 불러오게 되는 결과를 가져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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