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대 한반도 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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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미국의 대 한반도 정책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전략적 균형자로서의 미국의 역할은 아시아 지역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일본과 한국과 필리핀의 쌍무적 동맹관계의 주도자로서 자신의 입지를 지키면서 스스로 자신의 번영과 안정에 불가결한 사활적 이해관계가 있다고 간주하는 아시아에서 지역적 균형자역할을 자임하기를 계속할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로널드 스틸은 스스로는 미국의 대외 리더쉽의 역할을 축소해야 한다고 하는 이른바 계몽된 미국 내셔널리즘(enlightened American nationalism)을 주창하는 사람이지만, 그 역시 "세계와의 심오한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 앙가주망은 미국에게는 하나의 선택사항이 아니다. 그것은 순전한 현실이다."라고 지적한다.
냉전시기에는 한국에 있어서 미국은 공산주의의 위협으로부터 스스로를 지켜주는 궁극적인 보호자로 미국을 보았고, 소연방의 붕괴로 인하여 냉전은 사라졌다고 할 수 있지만, 현재 중국과 일본이 부쩍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모습에서 한국은 미국이 자처하는 균형자 역할에 의지하고 있다. 냉전의 종식은 군사적 대결의 종결을 가져오고, 상당부분에서의 군축의 효과를 가져온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이 경제적 차원에서도 상호의존과 상호호혜에 기초한 비제로섬(Non-Zero Sum)적 협력이 될지는 의문이다. 경제적 우위를 점령하기 위한 경쟁이 잠재적인 군사능력 유지의욕을 부추기는 경향을 가져오고 있으며, 예로서 동북 아시아에서 탈냉전 이후 오히려 군비증강에 대한 우려가 제기되고 있는 것을 들 수 있다.
Ⅱ. 냉전시대 미국의 한반도 군사정책
1. 한국전쟁 이전의 정책
해방 이후, 소련과 미국에 의해 각각 남한과 북한으로 분리된 한반도에 대한 미국의 정책은 많은 변화가 야기된다. 이와 같은 사례는 한국전쟁 발발 당시까지 여러 차례 일어난다.
1차적으로 미국에서는 한국의 전략적 가치를 인정하지 않았던 육군과 對韓 군사-경제원조가 한국의 생존을 위해 절대적이라는 국무성 사이에서 타협을 반영하여 1948년 4월 2일 미국의 철군결정(NSC-8)로 인가되었다. NSC-8은 1948년 말까지 철군의 완료를 결정했지만, 육군과 국무성의 견해 차이로 인해 이 결정이 시행되기까지 많은 어려움이 뒤따랐다. 1948년 4월 2일 NSC-8이 결정된 후 1949년 6월 철군이 달성되기까지 모든 정책결정자들은 각자의 해석에 입각한 정책집행을 고집하였다. 국무성은 한국에서 미국의 정치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보다 신축적인 철군계획을 전개시키려 하였고, 군부는 철군계획의 즉각적이며 확실한 실행을 주장하였다. 국지적인 차원인 한반도에서는 새 정계개입이 미국의 주도하에서 진행되고 있었지만, 아직 안정 기반의 구축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단독정권의 정통성을 제공하려고 끌어들인 유엔이 미국의 입장에서 만족할 만한 조치를 1948년 4월까지 내놓고 있지 않았다.
따라서 한국의 장래에 대하여 불안감을 느끼고 있던 美 국무성은 한국의 전략적 중요성을 다시 거론하려 하였고, 미군의 철수를 지연시키려 하였다. 국무성은 한국에 미군을 주둔시키는 것이 외부의 침공이나 내부의 전복을 억제해 주는 힘으로 작용하리라고 생각하였다. 한편 군부는 병력 부족에 집착하기도 했고, 한국의 전략적 중요성을 과소평가하기도 했기에 철군의 즉각적인 실행을 주장하였다.
2. 한국전쟁 이후의 對韓 외교정책
1952년까지, 한국전쟁은 미국 병력의 한계를 상징화하였다. 제 2차 세계대전에서 미군사력이 거둔 결정적 승리와는 대조적으로 미국은 채 10년도 못 지나 군사적 진퇴양난에 빠진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였다.
1952년 대통령 유세활동이 막바지에 접어들자 공화당 후보인 아이젠하워는 대통령에 당선된다면 전쟁의 명예로운 해결책을 모색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할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휴전의 전망을 보강하는데 있어 아이젠하워의 “나는 한국을 방문할 것이다.”라는 발표가 갖는 실질적인 의미가 무엇이든지 간에, 그 말의 즉각적인 효과는 의심의 여지없이 1952년 11월 4일 그의 압도적 승리에 기여하였다. 1952년 12월 아이젠하워가 대통령에 당선자로서 한국을 방문했지만, 한국전쟁은 그가 대통령이 된 후, 몇 달을 질질 끌다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휴전협정이 체결되어 종결되었다. 한국을 두 개로 분단하는 선은 1950년 6월 북한군이 남한을 침략할 때 넘은 38선과 실질적으로 다르지 않았다. 1953년 8월 미국은 대한민국과 안보조약을 체결하였다. 이러한 조약들은 미국의 방위공약을 유럽과 일본에 대한 트루먼 행정부의 강조에서 동북아시아에서 중동으로 확장된 안보주변으로 확대시켰다.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외교정책 형성을 위해 백악관내의 부처간 조정장치로써 국가안보보장회의를 폭넓게 사용할 수 있었다. 트루먼이 자신의 각료를 전체적으로 이따금 만났던 반면, 아이젠하워는 각료회의를 정책결정을 의논하고 대통령의 결정을 위한 대안들을 발전시키기 위한 핵심적으로 중요한 토론장으로 여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