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단군 긍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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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사] 단군 긍정론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Ⅰ.들어가며

Ⅱ.고조선의 건국시기/영역

1. 고조선의 건국시기
2. 고조선의 영역문제
(1)유물을 통해 알아본 고조선의 영역
(2)문헌에 나타난 고조선의 영역

Ⅲ. 단군실존여부에 대한 논쟁(남한학계 긍정론을 중심으로)

1. 일제의 상고사 말살 정책과 단군
2. 단군신화는 단순히 신화일 뿐인가?
(1)신화의 개념
(2)문헌상 단군신화의 내용
(3)역사적 사실과 단군신화의 관련성
3. 단군이라는 호칭

Ⅳ. 북한학계의 주장
1. 북한 역사학계의 기본적인 입장
2. 1930년대~1980년대 북한 역사학계의 주된 흐름
3. 단군 설화의 의미에 대한 재해석

Ⅴ. 들어가며

Ⅵ. 참고문헌

본문내용
(2)문헌에 나타난 고조선의 영역
지금 현재 고조선의 영역를 총괄적이고 구체적으로 언급한 문헌이 남아있지 않아서 문헌으로의 연구가 어려웠다. 따라서 고조선의 역역문제는 항상 고고학적 측면과 문헌의 측면에서 연구, 종합해왔다.
국내의 문헌으로는 13세기 무렵에 고조선에 대해 언급한 가장 오랜 문헌인 와 가 있다. ‘고조선’에는 고조선이 도읍을 네 번 옮긴 것으로 기록 되어 있다. 고조선이 네 번이나 도읍을 옮겼다면 그 영토는 상당히 넓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전조선기’에는 “요동에는 중국과는 완연히 구별되는 세계가 있으니 그 가운데 사방 천리가 조선‘이라는 표현이 있다. 이 표현을 따르면 고조선은 요동 지역에 있었다는 것이 된다. 이렇게 고조선의 영역을 대동강 유역으로 본 삼국유사와 고조선의 영역을 요동 지역으로 본 제왕운기에 나타난 견해는 서로 다른 것처럼 보인다. 지금까지 고조선의 위치를 대동강 유역과 요동지역으로 보는 견해가 대립되게 했던 기원은 위 두 기록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위 두 기록을 대립된 다른 견해로 볼 것이 아니라 종합하는 시각으로 해석한다면, 고조선의 영역은 대동강 유역과 요동 지역을 모두 포괄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국내의 문헌이외에 와 가 편찬된 시기의 중국 문헌에는 고조선의 위치를 비교적 구체적으로 알게 해주는 지도가 있다. 이 지도는 중국의 증선지(13세기 송말부터 원초에 걸쳐 활동한 당시 중국을 대표하는 역사학자)가 지은에 실린 지도이다. 이 지도에는 조선이 발해의 북쪽 만주에 자리해 있고 만리장성이 발해의 서북부에서 끝난 것으로 그려져 있다. 또한 ≪사기≫ 에는 중국이 통일된 직후 진제국과 고조선의 국경에 대한 기록이 있다. 이 기록은 진제국의 영역을 말하는 과정에서 언급되었다. 중국은 진시황이 처음으로 통일하였기 때문에 가장 넓은 영토를 확보했던 시기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보다 앞선 시기에 중국의 국경은 이 시기보다 동쪽에 있었을 리가 없을 것이다. ≪사기≫ 26년조에는 “중국을 통일한 진나라의 영토가 동쪽은 바다에 이르고 조선에 미쳤다.” 라고 언급하였다. 그리고 진나라가 조선과 국경을 접한 지역을 요동이라 하였다. 이를 통해서 고조선의 서쪽 국경이 요동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부분을 해석하면서 진나라의 국경이 지금의 요동에 있던 것으로 잘못 해석하기도 한다. 하지만 고대의 요동과 현재의 요동은 다른 곳이다.《후한서》‘고구려전’, ≪삼국지≫‘고구려전’에 “고구려는 요동으로부터 동쪽으로 천리 떨어진 곳에 있다”고 기록 되었다. 고구려는 지금의 요동 지역에 있는데 고구려를 요통으로부터 동쪽으로 천리 떨어져 있다고 했기 때문에 고대의 요동은 지금의 요동으로부터 서쪽으로 1천리 떨어진 곳에 있는 것이다. 고조선과 진나라의 국경은 지금의 요동으로부터 서쪽으로 1천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요동의 위치에 대해서《사기》에 당시 요동의 위치를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이 있다. 요동은 2세 황제가 순행한 지역에 포함되어 있어야 하고 진시황제의 각석이 있는 곳이어야 한다. 또한 요동은 중국의 동북 지역에 있었기 때문에 그곳은 중국의 동북 지역에 있어야 한다. 위 조건을 충족하는 곳은 갈석산 지역이라고 볼 수 있다. 여러 기록들에 따르면 갈석산은 여러 곳에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갈석산의 위치는 ≪사기≫에서 찾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사기》효무본기에 서한 무제가 태산에서 봉선을 지낸 기록과 관련하여 갈석산이 등장한다.
『무제는 상동성의 태산에서 봉선을 지낸 뒤 그곳에서 해변을 따라 북쪽으로 이동하여 갈석산에 이르고 다시 요서를 거쳐 북쪽의 변경으로 이동하였다.』라고 기록되어있다. 이 기록은 갈석산이 산동성보다 북쪽에 자리해 있었음을 알려 준다. 또한 요서는 요동과 접해 있었으므로 갈석산 지역이 요동이었음을 분명하게 해준다. 그러므로 난하 하류 유역이 고대의 요동이었음을 알 수 있다. 고대의 요동은 지금의 요동보다 훨씬 서쪽에 있었음이 확인할 수 있다.
고조선의 북쪽 국경은《후한서》〈동이열전>‘예전’에 “예와 옥저, 고구려는 본래 모두 조선의 땅이였다”라고 기록된 부분을 통해 알 수 있다. 당시에 예는 지금의 함경남도 일부와 강원도 지역을, 옥저는 함경남도와 함경북도를, 고구려는 평안북도와 중국의 길림성 남부 그리고 요령성 동부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리고《제왕운기》에는 삼한과 부여를 포함한 비류, 신라, 고구려, 남옥저, 북옥저, 예 등 여러 나라는 고조선의 단군을 계승한 나라였다고 밝히고 있다. 이를 통해서 이 지역들이 고조선의 영토였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고조선의 남쪽 국경은《제왕운기》를 통해 알 수 있다. 이 기록에서는 삼한을 포함한 여러 나라가 고조선의 단군을 계승했다고 하였기 때문에 그것은 그 영토까지를 포괄한 의미였다. 이렇게 본다면 고조선의 남쪽 국경은 한반도 남부 해안선으로 잡아야 한다. 결국 고조선의 영역은 한반도와 만주를 포함한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윤내현(2003), 우리 고대사, 상상에서 현실로, 지식출판사,
윤내현(1998), 고조선, 우리의 미래가 보인다, 민음사
윤내현/박선희/하문식(2005), 고조선의 강역을 밝힌다, 지식산업사
윤내현(1994), 고조선 연구, 일지사
윤내현(1998), 단군신화-檀君神話의 역사성과 한웅․곰․호랑이의 正體-, 인문과학 第 28輯
김정배(2005), 고조선과 비파형 동검의 문제, 제 1․2차 남북 역사학자 공동학술회의 발표(제출) 논문
이기동(2000), 「북한에서의 단군연구와 그 숭앙운동」, 『한국사시민강좌』
이형구(1999), 『단군과 고조선』, 살림터
서영대(1995), 『단군 신화 연구』, 백산자료원
윤내현(1991), 월간 말 1991년 6월 호 186~190p.
박정학(2001), 단군에 대한 인식 혼란에 관한 연구, 강원사학 제 17․18합집 , 53~7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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