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공학에서 바라본 세종대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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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자동차공학에서 바라본 세종대왕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세종은 조선의 4대 왕으로써 1418년부터 1450년까지 재위하였다. 이름은 도, 자는 원정, 태종과 원경왕후 민씨의 아들이며, 심온의 딸 소헌왕후의 남편이다. 12살이던 1408년 충녕군에 봉해지고, 16살인 1412년에 충녕대군에 진봉되었으며 22살이던 1418년에 세자에 책봉되었다가 같은 해 8월에 아버지인 태종의 양위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
세종은 가장 위대한 왕으로 평가되고 있으며 그에 걸맞게 수많은 업적을 남겼다.
세종대왕의 업적과 그 시대의 정치상황을 조금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자동차공학의 관점에서 생각해 보았다.
Ⅱ본론
세종시대 때의 정치 상황은 다른 시기에 비해서 조금은 평온한 시기라고 볼 수있다. 물론 전쟁이 전혀 없었다고 할 수는 없지만 다른 시대에 비해서 나라안의 정치상황이나 나라밖과의 전쟁 상황이 좀 더 안정적이였기 때문에 문화와 과학 그 밖의 다른 분야에 좀 더 집중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세종은 즉위 후 정치, 경제 ,문화면에 훌륭한 업적을 쌓아 민족의 문화를 한 단계발전 시키고 조선 왕조의 기틀을 튼튼히 하였다. 또한 한글 창제를 비롯하여 조선 시대 문화의 융성에 이바지하고 과학 기술을 크게 발전시키는 한편 축적된 국력을 바탕으로 국토를 넓혔다. 1420년에 설치된 집현전은 젊고 유능한 학자들을 육성하는 동시에 왕과 세자에 대한 학문적인 자문과 교육과 각종 학술 연구, 서적 편찬을 담당하는 기구였다.
세종대왕은 어떤 문제를 연구하고 풀어나가는 과정에서 여러 많은 대신들과 상의하고 그들의 의견을 새겨들었다. 정치를 할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그것이 귀가 얇아서 다른 사람들의 말에 쉽게 현혹되었던 것은 물론 아니다. 자신이 옳은 일이라고 생각되면 끝까지 밀고 나갈 줄 아는 추진력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의 대표적인 예가 한글창제이다. 세종대왕이 처음 한글창제를 한다고 했을 때 많은 대신들은 그것을 반대하였다. 중화사상에 위배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세종은 우리말을 만들어 백성들을 깨우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되어 그 일을 추진함으로써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언어인 훈민정음을 창제해 낼 수 있게 되었다.
이처럼 어떤 어려운 일을 헤쳐 나가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말을 귀 기울여 듣고 자신이 옳다고 판단되는 일은 또한 추진해 나갈 수 있는 추진력도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자동차를 예를 들어보겠다. 새로운 자동차를 연구하고 생산해 내기 까지는 수많은 사람들의 협동이 있어야 한다. 아무리 뛰어나고 천재라고 불리울만한 엔지니어가 있더라도 그 사람 혼자서는 절대로 자동차를 생산 할 수도 없고 연구한다는 것도 불가능할 것이다. 자동차에는 수만은 분야들이 접목되어있다. 자동차를 디자인하는 디자이너도 필요할 것이고, 차량을 설계할 엔지니어들도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차 내부에 들어갈 시트를 만들기 위해서 그 분야의 사람들도 필요 할 것이다. 이렇듯 여러분야가 접목되어 있는 것을 한명의 뛰어난 사람이 독단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극히 일부분일 것이다.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서로 정보를 공유하고 서로의 의견을 수렴하고 부족한 점들을 조금씩 보완해 나감으로써 좀 더 훌륭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무엇인가가 창조 될 것이다.
세종은 과학기술에 대한 뛰어난 발전을 이룩했다. 세종은 우량을 분포 측정기인 측우기를 제작하게 했는데 이는 서양의 측우기보다 무려 200년이나 앞선 것이었다. 그리고 궁중에 과학관인 흠경각을 설치하고 과학기구를 비치하도록 했고 훈천의, 해시계, 물시계 등 각종 과학기구를 발명하였다. 이렇듯 세종은 과학에도 관심을 쏟았고 그 결과 훌륭한 발명들을 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