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정지용 레포트

 1  시인 정지용 레포트-1
 2  시인 정지용 레포트-2
 3  시인 정지용 레포트-3
 4  시인 정지용 레포트-4
 5  시인 정지용 레포트-5
 6  시인 정지용 레포트-6
 7  시인 정지용 레포트-7
 8  시인 정지용 레포트-8
 9  시인 정지용 레포트-9
 10  시인 정지용 레포트-10
※ 미리보기 이미지는 최대 20페이지까지만 지원합니다.
  • 분야
  • 등록일
  • 페이지/형식
  • 구매가격
  • 적립금
자료 다운로드  네이버 로그인
소개글
시인 정지용 레포트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정지용이 태어나서 자라 보통학교 4년을 마칠 때까지 고향에서 살았으며, 그 후에도 대학을 마치고 모교인 휘문 중학교 교사로 취임하여 서울로 이사할 때까지 그의 본거지가 되고 있었던 셈이다. 이 시인은 유학차 서울과 일본의 경도(京都)를 전전하면서도 언제나 고향을 못 잊어 하고 있다. 그것은 대게 그의 학창시절에 이루어진 초기시의 나 민요풍시와 동시에 나타나 있는데, 한마디로 고향의 주변에 흩어져 있는 전설이나 민간전승을 소재로 하고 있다.
정지용은 자신이 태어나서 자란 고향 마을의 자연과 소박한 촌민들의 인정어린 풍경을 노래하고 있다. 1919년 12월호 지에 실린 정지용의 최초의 발표 작품으로 휘문고보 2학년 때 쓴 유일의 소설이라 할 수 있는 의 배경으로 된 옥천의 고향마을과 등잔인물의 하나인 누이동생을 소재로 삼고 있다. 지금은 충남 논산에서 살고 있지만, 누이동생 계용(桂溶)을 정지용은 무척 사랑했다고 한다.
정지용은 1902년 충북 옥천읍의 촌가에서 한약상을 경영하던 정씨 泰國(태국)을 아버지로 하고, 정씨 美河(미하)를 어머니로 하여 그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어린 나이인 12세 때 동갑의 부인인 송재숙과 결혼을 한다. 어머니의 태몽에서 유래되어 그의 이름을 이라 했는데, 이 음에 맞춰 후에 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부친 정태국은 젊었을 때, 중국과 만주 등지를 전전하면서 익힌 한의학을 바탕으로 고향에 돌아와 한약상을 경영하여 어느 만큼은 부(富)를 축척했었으나, 불의에 밀어닥친 홍수의 피해로 가세(家勢)가 갑자기 기울어져 가난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정지용이 옥천공립보통학교를 마치고 4년간 독학을 하였다.
⑵휘문고보와 搖藍時代(요람시대)
휘문고보시절 정지용의 학업 성적은 극히 우수한 편으로 그의 재능은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그의 성적표에 나타난 특징은 창가나 체조 등 일부 실기과목을 제외한 학과 성적은 대체로 우수한 편이다. 물론 이 성적표를 통하여 그의 시적 재능을 추단할 수는 없으나, 각 과목에 걸쳐서 우수성을 보인 재능의 소유자임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맺어진 휘문고보와 정지용과의 인연은 불가분리의 관계로 보다 깊이 맺어진다. 50평생을 통하여 그는 20여년을 휘문고보에서 보낸 것이다. 그의 문학에 대한 개안(開眼)도 이 무렵으로 추정된다. 휘문고보 시절의 교우로는 홍사용(洪思容), 박종화(朴鐘和), 김영랑(金永郞), 이태준(李泰俊) 등과의 선후배 사이로 서로 주고받은 자극이 보다 컸을 것으로 생각된다. 휘문고보 2학년 때에는 민족적 대거 사였던 3.1 운동이 일어나 그 해 가을까지 수업을 받지 못하였다. 이때 그에게는 큰 사건이 일어났다. 그것은 다름 아닌 휘문사태의 주동이 되어 동급생인 이선근(李瑄根)과 함께 무기정학 처분을 받게 되었다.
1918년 재학생과 졸업생이 함께하는 를 결성했다. 이 무렵 정지용은 1학년생으로서 을 결성하여 그의 문학적 정열을 불태우고 있었다. 그는 조숙한 학생으로서 쉽사리 학교생활에 적응하고 문학을 좋아하는 친구들을 모아 지를 계획한 것이다. 지의 창간호는 정지용이 박제찬(朴濟瓚), 박팔량(朴八陽) 등과 함께 엮었다고 한다. 이 무렵 정지용은 문학에 대한 열성이 대단했다. 휘문고보 2년생으로서 지 창간호에 발표한 첫 발표작품이라는 소설은 그의 문학적 재능뿐만 아니라, 문학에 기울인 그의 정열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그 청소년기의 막연하지만 문학에 대한 열정과 우의관계(友誼關係)의 긴밀함을 보인 것이 요람시대이며, 그의 시심(詩心)을 태동시킨 시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청소년기의 문학에 대한 정열이 없이는 후일의 대성을 기할 수 없었다고 할 때, 중요한 시기임을 말할 것도 없다.
⑶경도압천(京都鴨川)과 이국의 향수
정지용은 휘문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의 경도에 위치한 동지사(同志社)대학에 입학했다. 거기서 그는 영문학을 전공하면서 새로운 서구문학을 본격적으로 접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새로운 문물에 대한 경이감이나 황홀감도 느꼈겠지만, 그에 못지않게 멀리 이국의 하늘 밑에서 느끼는 고독과 향수, 그것은 서울에서 고향으로 뻗어가는 그것보다 훨씬 더 절실했다. 이 무렵에 그 초기의 동시나 민요풍의 시편들이 상당수에 이른다. 먼 뱃길을 따라 를 익히고 새로운 서구문물을 접촉하면서 그의 평온했던 심해(心海)에는 커다란 파도가 일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그의 시세계는 보다 공간적으로 확대되고 다양하게 전개된 것이다.
동지사대학(同志社大學)에서 정지용은 영문학을 전공하면서 윌리엄 블레이크와 북원백추(北原白秋)의 시를 읽고 배우면서 그의 시에 대한 시야는 보다 넓어졌다. 이 때에 그의 시적 재능을 인정받기 시작하여 본 궤도에 올라서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등 그 당시의 잡지에 수준 높은 시편들이 무수히 발표되면서 한 시인으로서의 출발과 기반을 굳게 구축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정지용은 대학시절부터 종교적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유족의 말에 의하면, 일본 유학 당시 시인은 이미 천주교를 신앙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언젠가 방학이 되어 고향에 돌아온 그는 부친께 천주교를 믿자는 제의를 하였다는 것이다. 그의 부친은 갑자기 밀어닥친 홍수의 피해를 입어 가산을 송두리째 잃고 신앙을 잠시 포기했다가 아들의 제의를 받고 얼마 후에 천주교 신자가 되었으며, 그 뒤로 이 시인의 집안은 4대에 걸쳐서 천주교를 믿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독실한 신앙생활을 바탕으로 한 시편들은 지의 편집에 직접 관여하면서 발표되기 시작했다. , , , , 등 이외에도 그의 신앙에 관련된 시편은 더 있다.
⑷시문학 동인으로서의 시단활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