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작가론 정지용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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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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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우선 어느 작가를 선택해야 할지 무척 난감했다. 해보고 싶은 것은 많았지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어려웠고, 시간도 그리 넉넉한 편도 아니었다. 무척 난감해 하던 나에게 실마리를 준 것은 다름아닌 어머니였다. 어머니 고향인 옥천에 유명한 작가분이 계시다는 것이다. 그렇다. 바로 그분이 ‘향수’라는 시로 유명한 정지용 시인이다.
◎정지용의 생애
충북 옥천읍에서 북동쪽으로 10리쯤 떨어진 곳에 곧게 뻗어 나간 산줄기, 일자산(一字山)이 있다. 이 산의 계곡에서 흘러내린 물이 모여 실개천을 이루고 있는데, 이 개천을 건너는 다리가 청석교(靑石橋)이다. 지용은 1902년 6월 20일(음력 5월 15일), 이 다리 바로 옆에 있는 촌가에서 한약상을 경영하던 영일 정씨 태국(泰國)을 아버지로 하고, 하동 정씨 미하(美河)를 어머니로 하여 4대 독자로 태어났다.
지용의 아명은 지용(池龍)이었다. 이 이름은 지용의 어머니가 연못에서 용이 하늘로 올라가는 태몽을 꾼 데서 비롯되었으며 본명도 이 음을 취해 지용(芝溶)으로 지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로 미루어 보아 그는 출생에서 성장에 이르기까지 온 가족들의 비상한 관심과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4대 독자인데다 아버지가 젊은 시절에 방랑생활을 했다고 한다. 그러니 가족의 지용에 대한 기대는 무척 컸다.
그의 부친은 한때 중국과 만주를 방랑하며 한의술을 배웠고, 고향에 돌아와 한의업을 개업하여 재산을 꽤 모았으나, 어느 해 밀어닥친 홍수의 피해로 가세가 갑자기 기울어 가난했다고 한다. 원래 영일 정씨들이 집단촌을 이루며 살던 곳은 충북 수북리 꾀꼴 마을이었는데, 그 본고장에서 살지 못하고 하계리 개천가로 이사를 온 것이다. 그때 지용의 부친은 처가 친척인 송지헌의 농장에서 머슴살이를 했다. 지용은 “나는 소년적 고독하고 슬프고 원통한 기억이 진저리가 나도록 싫어진다”고 회고한 바 있다. 4대 독자로서 느껴야 했던 숙명적 고독감과 부친의 방랑과 실패, 가난 등으로 어린 지용은 불행했다.
후일 이런 어린 시절의 아픈 기억들이 그의 문학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음은 당연하다.
정지용은 17세에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진학했다. 휘문고보는 성적이 우수하고 형편이 어려운 그에게 재학시절에 장학금을 주었고, 졸업 후에도 유학 비용을 부담했다. 유학을 마치고 모교에서 영어 교사로 16년간 재직하였였다.
휘문고보 1학년 때부터 그는 동인지 ‘요람(搖籃)’을 통해 습작활동을 시작했다. ‘요람’의 동인은 고보와 전문학교 학생들로, 지용과 박제찬, 박팔양, 김화산 등이며, 정지용이 그 주체였다. 지용은 ‘요람’에 ‘정지용시집’ 3부에 수록된 동시의 절반 이상을 발표했으며, 2학년 때는 ‘서광(曙光)’지에 『3인』이라는 소설도 발표하였다.
정지용은 또 학생자치회와 동문회를 연합한 재학생, 동문의 자치기구인 의 학예부장이 되어 휘문고보 교지 ‘휘문’ 창간호를 발간했다. 여기에 그의 최초 번역물 3편, ‘퍼-스포니와 수선화(水仙花)’, ‘여명의 여신 오-로아’, ‘기탄잴리’ 103장 가운데 1~9장을 번역하여 실었다. 아시아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이며, 당시 인도는 물론 전세계를 뒤흔들어 놓은 신화적 인물인 ‘타고르’의 노벨상 수상작을 무명의 고보학생이 처음으로 번역을 시도했다는 것은 그의 문학적 재량이 컸음을 잘 보여준다. 김억이 『기탄잴리』를 완역한 것이 1923년 4월인데, 지용은 이보다 조금 앞서서 번역을 시도했던 것이다.
정지용은 학업성적이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문예활동도 활발하게 하여 교사들의 귀여움을 받은 것은 물론 학생들 사이에도 인기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교사에게 무조건 복종하는 순응형은 결코 아니었다. 그가 2학년 때인 1919년에 3 · 1운동이 일어났고, 이때 학교마다 휴교 사태가 발생했다. 휘문고 학생들도 많이 검거되었고 그 여파로 이 학교에서도 학생들이 도서관, 기숙사, 강당의 건립을 강력히 요구하며 일제히 동맹휴학에 들어갔다. 이 사건에서 지용은 이선근과 함께 주동자가 되어 집회에서 연설을 했고, 그로 인해 무기정학을 당했지만 선배들의 중재로 곧 구제되어 무사히 졸업을 했다는 것이다.
정지용은 졸업과 동시에 휘문 교비로 일본의 교토에 있는 도시샤(同志社) 대학 예과에 입학했다. 6년 후인 1929년 같은대학 영문과를 졸업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한국문단과 일본문단에 등단했다. 1926년 6월 ‘학조(學潮)’ 창간호에 ‘카페 프란스’ 등의 시와 시조 및 동요를 포함한 9편의 작품을 발표했다. 이어서 ‘조선지광(朝鮮之光)’, ‘신민(新民)’ 등에 작품을 계속 발표하여 시인으로서의 확고한 위치를 차지했고, 일본의 『근대풍경(近代風景)』에 3년간(1926. 12~1928. 2) ‘카페 프란스’, ‘바다’, ‘갑판위’ 등 시 13편, 수필 3편을 발표했다.
참고문헌
참고자료
『정지용 시의 연구』이종우, 2000
『정지용 시 연구』김종태, 2002
『정지용 시세계 연구』이종연, 2002
옥천일보
『다시읽는 정지용 시』최동호外, 2003, 월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