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근의 <상대별곡>과 조선 초 신흥사대부
Ⅰ. 들어가며
『악장가사』에 전하는 이 노래는 언제 지어졌는지 확실치 않다. 다만 노래의 내용과 작자인 권근의 이력을 볼 때, 조선이 건국된 뒤부터 그의 졸년 사이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작자가 1399년 대사헌을 맡았으므로, 그 뒤의 어느 시기에 지어졌
성리학의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친 楊時・文彦博・王安石 등의 유학이 이미 고
려에 알려져 있었고 고려말의 주자학 도입과 수용은 고려중기의 성리학 이해를 전제해야만 가능하다고 한다. 원에서 주자중심의 성리학이 도입되기 이전에 성리학에 대한 前理解가 있었다는 사실은 조선전기 성리학의 성
홍대용은 서구 과학사상에 깊이 매료된 후였으며 그의 후학들, 박제가, 이덕무, 유득공, 등은 正祖의 부름을 받아 규장각에서 고문을 해석하고 새로운 文物을 받아들일 준비에 열중인 상태였다. 박지원 나이 50세가 다 되어 繕工監 監役이란 관직을 임명받는다. 그것도 화려하지 않은 허접스런 관직생활
박제가의 ‘북학의’와 그 사상은 북학파 실학사상의 결정체요 전형이라 할 수 있다. 북학파는 비슷한 시기에 주로 서울 근교의 전원에서 생활했던 남인 출신의 실학자들 (경세치용학파 또는 성호학파)과 여러 측면에서 차이가 있었다. 그들은 모두 수백년 봉건사회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하여 이른바
사상적 측면에서 고려 사회를 지도하는 이념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했으며, 사회ㆍ경제적 측면에서도 심각한 폐단을 초래했다. 또 하나의 요인은 성리학의 수용이다. 성리학은 적극적인 도통 관념에 의한 벽이단(闢異端)의식에 정초하고 있을 뿐 아니라, 불교의 이론에 정면으로 맞설 만큼 이론적 무장
조선이라는 상황이라는 점을 인식하여 서양화의 기법을 수용하였기에 조선후기의 회화는 전통회화를 새롭게 전개 시켜 나가는 단계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상에서 조선 후기의 실학사상은 중국으로부터 서양화기법을 유입할 수 있게 한 밑거름이 된 동시에 한국회화를 근대적 성격의 회화로 발전
다산의 실학사상은 다양성을 지향하고, 묵은 제도를 개혁하려 하고, 실용적․합리적이고, 평등을 주장하며 광범위한 영역을 연구하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이는 교육의 기회를 균등하게 주되 능력에 의한 교육을 실천하고, 그를 위하여 조선시대의 학제를 개혁할 것을 주장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
사상은 널리 퍼지지 못하고, 잊혀지고 말았다. 그의 이름과 학문 및 사상이 다시금 햇빛을 보게 된 것은 겨우 1960년대에 이르러서였다. ‘저자 미상’이었던 『우서』가 그의 저작임이 밝혀지면서 일약 유수원의 학문과 사상에 대한 역사적 조명이 집중되었다. 그리하여 오늘날 그는 실학자 가운데서도
Ⅰ. 여말선초 시기, 정몽주와 정도전
한국 사상사에서 고려 말 조선 초기는 시기적으로 매우 중요한 분기점이다. 그것은 무엇보다 성리학 수용을 계기로 신라시대와 고려시대의 한국사상사 속에서 지대한 기능과 역할을 담당하였던 불교사상을 대신하여 유학사상이 사상계의 전면에 부상했기 때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