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들은 19세기말 미국 교회의 종교 대각성운동과 이와 연관된 학생선교자원운동에 영향을 받은 경우가 많았다. 특히 무디(D. L. Moody)외 전천년주의 재림운동과 그가 이끄는 해외 선교 운동에 영향을 받은 선교사가 많았다. 이들은 성경 중심적 보수주의 신앙과 신학을 한국인들에게 주입하였고 그
한국인 개종자들이 만주와 한국을 왕래하면서 중국에서 간행된 한문성경을 조금씩 국내에 반포하였다. 그러다가 로스는 최초의 한글성경이 간행되자 식자공 김청송을 그의 고향 즙안에보내어 성경을 반포하게 하였으며, 1882년 10월에는 서상륜을 대영성서공회의 최초의 권서인으로 파송하여 한국에
선교사들과 교회를 찾았다. 교회에서 성경공부와 신교육을 받으면서 점차 애국 애족정신으로 승화되었다.
개항이후 국운이 날로 쇠잔해가자 교인들의 신앙은 충군애국적인 형태로 표출되었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은 자연스럽게 국가 황실의 안녕과 국권수호를 위한 기도회와 연설회 등을 개최하면서
한국인으로만 구성된 팀도 있겠지만 국제팀을 구성해, 보다 세계화된 선교사로서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드는 것도 좋은 방안이 될 수있겠다.
단기사역에는 현지인과의 Bonding 관계를 맺을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하는데 이때 장기선교사는 단기선교사가 현지인과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환경을 만
컸다. 외국인 선교사들은 교육 사업을 단지 선교수단으로만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의 국민 수준을 향상시키기 위해 교육 사업을 지원하였다. 이는 개혁적인 전통이 강한 미국 개신교의 전통적인 선교 방법이었다. 실제로 미국인 선교사들 대부분이 신앙인이면서 동시에 뛰어난 교육자들이었다.
기반을 이룩한 이데올로기로 사변되었고 그것이 지닌 부수적인 문화적 힘과 선교사들을 서구제국과의 접속 통로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미국과 통상조약은 체결하였지만 기독교의 유입은 강력하게 금했던 왕실도 기독교라는 서양종교가 지닌 눈에 보이는 현실적 능력이나 실체에는 매력을 느꼈다.
도서는 외국인들이 한국의 미와 예술에 관하여 연구한 것을 한국인 예술가들이 해석해 놓은 저작물이다. 이 책에 조은정의 “에블린 맥큔 : 내핍(耐乏)에서 발원한 선과 형태의 미”가 실려 있다. 남편과 더불어 한국에 관해 연구해 놓은 업적들이 한국 후학들의 연구에 디딤돌의 역할을 해 주고 있다.
한국인들에게 민족의식을 심어주고 구원과 해방을 향한 희망을 주었다. 또한 한국교회는 한글 성서를 출간하고 의전국적으로 보급함으로써 한글 대중화에 힘썼고 한국근대교육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초기 한국교회는 이렇게 한글로 출간된 성서를 가지고 교회를 세운 권서인과 복음전도에 힘쓴 전도
한국인은 한자를 쓰며 국민 모두는 한자를 알기를 원한다.
선교사들은 그 나라의 글자인 언문을 사용하기로 결정했으며 기독교 서적의 대부분을 언문으로 발행했다. … 그들은 엄청난 박해를 받았는데 이는 한국 역사에서 가장 놀랄 만한 사건 중의 하나이다.
국민들에게 복음을 전할 책임이 있다는
선교사들로부터 시작되었다. 선교 초창기에 기독교 선교가 아직 온전히 뿌리내리지 못했을 때에 한국인들에게 기독교는 여전히 낯설고 두려운 경계의 대상이었기에 선교사들은 교파성을 강조하기보다 선교 자체를 위해 협력하게 되었다. 그리고 1893년에 이르러 장로교공회와 감리교는 선교지 예양 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