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생명을 위협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상 황에서 개화파가 1884년 시도한 정치적 변혁이 갑신정변(甲申政變)이다.
1884년 겨울 김옥균, 박영효, 홍 영식 등의 개화파들은 자신들이 주도하여 세운 우정국의 낙성식 연회를 이용하여 정치적 변혁을 단행하였다.
즉, 그들은 수구파의 거두인 민영익(
사상에 두고 있다. ‘인내천’의 사상은 인간의 주체성을 강조하는 지상천국(地上天國)의 이념과 만민평등의 이상을 나타내는 것으로, 여기에는 종래의 유교적 윤리와 퇴폐한 양반사회의 질서를 부정하는 반봉건적이며 혁명적인 성격이 내포되어 있었다. 최제우가 ‘한울님’으로부터 받았다는 계시
사상은 한국적 민족주의사상의 방향성을 제시하기에 충분할 정도로 그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그것은 동학 창시자인 수운 최제우의 말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수운은 득도 후 제일성으로 포덕천하(布德天下)와 보국안민(輔國安民)을 외치는데, 여기서 포덕천하는 인류주의를, 보국
(空名帖)을 무제한 발매하는 등 품직(品職) ․ 수령직(首領職)을 대량 품부하였으며 이러한 풍습은 철종 말년에는 공공연히 자행될 정도였다. 매관매직을 통해 관직에 오른 사람은 재임 기간 동안 탐관오리가 될 수밖에 없었으며 지방행정의 폐해 또한 이로 인한 결과라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사상과 서학에 반대하고 척왜양을 주장하는 반외세사상이 내포되어 있었다. 때문에 동학은 위정자들로부터 사교로 금압되었고 교조 최제우는 흑세무민과 좌도난정의 죄로 처형되었다.
그러나 동학은 2대교주 최시형의 노력으로 봉건적 압제와 착취 그리고 제국주의의 정치, 경제적 침략에 시달리는
사회 안에서의 보다 행복한 삶’을 꿈꾸기 때문에 각각의 가지를 뻗치다보면 분명 연리지처럼 이 가지와 저 가지가 만나게 되는 합일점이 생기게 마련이다. 그런데 하필 필자가 유가와 불가를 제외한 도가를 중심으로 살펴보는 이유는 동학의 뿌리가 되는 사상과 만나는 도가의 사상이 가장 뚜렷하다
사람들이 용도를 절약하여 축적의 여유를 가지고 능력이 모자라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積善은 곧 인간 존엄성을 구체적으로 실현하는 길이고, 이러한 적선에 의하여 인간과 사회의 결속, 그리고 사회와 국가의 안정을 가져오게 한다는 신념과 실천의지가 바로 한국 전통윤리사상에 함축되어 있는
최제우 제세 시에는 동학내의 지도층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최제우의 체포와 순도과정에서 비판적 지식인의 상당수가 제거되었고 살아남은 이들은 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하자 불만을 품고 영해민란을 일으켰다. 영해민란이 실패로 돌아간 후, 비판적 지식인층은 크게 둘로 나뉘게 되었다.
영해민란이
사상사의 정립과 체계를 위해서도 선결되어야 할 과제이다. 김영철, 한국개화기시가연구, 새문사, 2004.
개화기 시가의 창작계층은 익명의 상태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뚜렷한 유형설정과 신분성향 및 그들의 사회적 성격을 구별하기란 힘든 일이다. 따라서 선행된 연구에서 이의 유형화된 창작계층의